12/31/2019

The Younger Edda - Foreword 1


서문(Foreword)


1.   태초에 전능하신 신이 하늘과 땅,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명의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들(아담과 하와)로부터 인류가 유래했고, 그들의 자식들은 늘어나서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은 균형을 잃었다; 어떤 이들은 선하고 올바른 것을 믿었지만, 더 많은 이들이 세상의 욕망을 쫓았으며, 신의 율법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신은 세상을, 노아와 함께 방주에 올랐던 것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홍수로 물에 잠기게 하였다. 홍수 뒤에 세상에 살았었던 8명이 살아남았고, 이들로부터 인류는 이어졌다. 그리고, 또 예전처럼 수가 늘어나서 세상을 채웠다. 아주 많은 이들이 부와 권력을 얻기를 갈망하였고, 신에 대한 복종을 외면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하느라 신의 이름을 부르러 하지 않았다. 그러면 누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신의 놀라운 업적을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그들은 신의 이름을 잃게 되었다; 이 넓은 세상에 창조주에 대해 말하는 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세상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해야 할 속세의 선물과, 부와 행복을 주었다: 신은 또한 인간들과 지혜를 나누어 주어, 인간이 세상의 모든 것과 하늘과 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을 이해하게 하였다. 이렇게 인간은, 어떻게 땅과 짐승과 새가 어떤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지만, 여전히 행동양식에서는 다르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궁금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본질의 증거는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 땅을 파면, 그 곳에서 물이 솟아날 것이라는 것이고, 물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깊은 계곡보다 더 깊이 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짐승과 새의 경우, 머리라고 발 보다 피가 더 많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본질의 또 다른 증거는, 매년 땅 위에 풀과 꽃이 자라고, 같은 해에 스러지고 시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짐증과 새들의 경우, 털과  깃털도 해마다 자라고 빠진다.  땅의 세 번째 본질은, 땅을 열고 파보면,  흙 가장 위에 있는 곰팡이에서 풀이 자란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바위와 돌이 동물의 이빨과 뼈와 같다고 설명했다. 이것들로부터 인간들은 땅이 틀림없이 살아있으며, 어떤 방식의 삶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놀라울 정도로 오래되고, 강한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땅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 영양을 공급하고, 죽은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이런 까닭에, 인간은 땅에 이름을 주었고, 자신의 조상을 땅에 다시 포함시켰다. 이렇게, 인간은, 수 백번의 겨울을 헤아렸을 때, 천체의  경로는 불규칙하며 어떤 천체들의 경로는  다른 천체보다 길다는 것을 옛 동족에게서 배웠다: 그러한 것으로부터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로 천체가 그 경로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천체의 지배자가 있을 것이이며, 그는 강하고 전지전능하지 않을까 상상하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그 존재가 중요한 요소를 지배한다면, 천체가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이고, 그 존재가 천체의 경로를 지배한다면, 햇빛과, 하늘의 이슬(별인가?), 그리고 그것들을 따르는 땅의 산물, 즉 바람과 바다의 폭풍도 다스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영역이 어디인지는 몰랐지만, 그가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천상과 천체, 바다와 날씨를  통치한다고 믿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더 잘 이야기되고, 기억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그에게 자신들과 같은 이름을 주었으며, 사람들이 갈라지고 언어가 나뉘면서, 이 믿음은 여러 형태로 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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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2019

The Younger Edda - Introduction 3



고에다가 오딘 신앙을 일련의 시와 광시곡으로 표현한 반면, 신에다는 체계화된 신의 계보와 우주론을 포함하고 있다. 고에다가 운문인 반면, 신에다는 주로 산문이다. 신에다는 어떤 의미로 고에다의 후속편 또는 주석으로 볼 수도 있다. 둘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있으며, 따라서 에시르 신앙의 포괄적 개념을 알기 위해 무용담들과 모든 튜톤의 전통, 설화와 연관지어 연구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에다는 마치 오딘의 성경 같다. 고에다가 구약, 신에다가 신약이다. 고에다는 구약성서처럼 시로 표현되었고, 예언적이며 수수께끼이다. 신에다는 신약성서처럼 산문이고; 명확하며, 고에다 속의 애매한 문장에 관한 실마리를 준다. 아니, 여러모로 두 가지 에다는 그리스도 성경의 두 가지 성서와 부합한다.

우리 선조들의 종교가 이 나라 안에서 별로 관심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개탄스러운 사실이다. 모든 학생들이 다른 나라의 신화에 관심을 보인다. 학생들은 아주 큰 열정을 가지고 그리스 로마, 인디아, 그리고 중국의 모든 전설을 읽는다. 그들은 크레테(Crete)의 미궁의 모든 방에 익숙하나, 발할(Valhal)과 글라드스헤임(Gladsheim)의 빛나는 홀에 들어서면, 눈먼 사람처럼 길을 더듬는다. 그들은 이둔(Idun)이 그녀의 아름다운 사과로, 아리아드네(Ariadne)가 그 멋진 실로 활약하는 것보다 훨씬 큰 활약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가 튜즈데이(Tuesday), 웬즈데이(Wednesday), 써스데이(Thursday), 프라이데이(Friday)가 누구의 이름에서 나왔냐고 묻고, 튀르(Tyr) 와 오딘(Odin), 쏘르(Thor), 프레위야(Freyja)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알고 있다는 눈초리밖에 받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는 한 민족으로서 고대 유대인과 같은가? 그래서 우리는 외국의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 신들의 제단을 버리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불행한 민족의 운명 – 우리 선조들의 땅을 잃고 전세계에 흩어져 버린 그들의 운명 –을 겪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선조들은 이 에다 안에, 가장 심오하고, 가장 숭고하며, 최선인 그들의 사고를 우리에게 남겼다. 그것들은 우리 선조의 가장 위대한 지적, 영적 노력이 농축된 결과이며, 우리는 이 보물을 소중히 하고, 그것을, 물푸레나무 위그드라실의 미국 쪽 가지 전체가 거기에서 통합된 국민적 정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샘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우리 선조의 신과 여신들에게서 먼지만 털어내어우리 박물관과 도서관의 단상에 그 신들을 장식품처럼 올려놓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다. 이 과거의 동전을 화폐 수집품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손자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 동전을 알아볼 수 없다면, 자유롭게 통용될 수 있도록 조폐국으로 보내어 새로이 주조해야 한다. 우리 선조의 신격체들은 우리의 가슴 속, 우리의 노래 속에 자리를 갖기를 원한다.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 사제들은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는 것에 지나치게 큰 열정을 쏟았기에, 에시르 신앙에 대한 모든 흔적을 뿌리 채 뽑아버리려 했다. 그들은 이교도 종교 체계를 알아볼 수 없는 파편으로만 남겨두었다. 우리의 신과 여신들, 영웅들은 잊혀진 상태로 몰아넣어 졌고, 행운의 별이 아이슬란드의 운명을 돌보지 않았다면, 오딘 종교의 모든 지식과, 니플룽(Niblung) 이야기는 거의 완전히 흔적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외딴 구석에, 빙하의 눈과 얼음 아래에서 헤클라(Hekla: 아이슬란드 남쪽에 있는 성층화산. 874년 이래 20번이 넘는 폭발이 있었다. 중세에는 지옥으로 가는 길목(Gateway to Hell)이라 불렸다.(위키백과))에서 뿜어나와 식어가는 용암의 불빛처럼  선조의 영혼이 보존되어 있다. 멀고 먼 툴레(Thule: 고대 그리스 로마 문학과 지도에서 가장 먼 북쪽이라 언급되는 지역, 2010년 베를린 공대 과학자들은 이곳이 노르웨이의 섬 스묄라(Smøla)라고 추정하였다.(위키백과))에서, 우리 조상들의 얼이 솟아올라 온 튜턴 영지(Teutondom)를 밝게 비추었다. 아이슬란드가 발견된 것은 860년이다. 874년에 튜턴의 얼이 폭정을 피해 그곳을 안식처로 삼아 날아들었다. 여기 옛 튜톤(Teuton)의 해방 원칙을 기초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곳에서 용감한 바이킹이 출발하여, 그린란드(Greenland), 빈란드(Vinland)를 발견했고, 콜롬부스에게 아메리카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이곳에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잉글란드, 여기에서 그리고 독일의 궁정에서 그들을 칭송하는 스칼드(Skald)가  나왔다. 옛 튜턴 사회제도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법과 무용담들이 기록되어 여기 들어있다. 여기 옛 노르드(Nord) 언어와 우리 선조들의 종교와 제도, 풍습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그 문학은 아이슬란드의 것만은 아니다 – 온 튜턴 민족의 것이다!  튜턴에게 아이슬란드는 남부 유럽에게 그리스 로마가 의미하는 바와 같으며, 효율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그 임무를 완수했다. 대 카토는 자신의 모든 연설을 다음 말들로 마무리 짓곤 했다. “Præterea censeo Carthaginem esse delendam.(덧붙여, 카르타고는 멸망하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즈음 로마카톨릭 신전에서 그렇게 많은 숭배가 이루어지는 이 때, 우리는 카토의 문장을 다음의 형태로 적용하는 것이 완벽하게 맞다고 생각한다 : Præterea censeo Romam esse delendam.(덧붙여 로마는 멸망하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교라 해야 할 것 같은데, 꼭 집어 로마카톨릭(Romanism:로마카톨릭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명칭)이라고 했다. 로마카톨릭마저 이단이라고도 하는 개신교는 다른 종교를 절대 없어야 할 것으로 치부하고 있고, 카톨릭이 다른 종교에 대해 훨씬 포용적인데. 중세 시대 그리스도교 외의 다른 모든 것을 박해하던 때는 구교 신교로 나뉘기 전이니 로마카톨릭이 한 짓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하지만 이 소개 글은 중세에 쓰인 것이 아닌데. )

또 철자 정리
우리말R.B.Anderson일반적 철자고대 노르드어
발할ValhalValhall, ValhallaValhöll
글라드스헤임GladsheimGladsheimGlaðsheimr
튀르TyrTyrTýr
오딘OdinOdin, OthinÓðinn
쏘르ThorThorÞórr
프레위야FreyjaFreyjaFreyja
니플룽NiblungNiflungNiflung
이둔IdunIdunIðu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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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2019

The Younger Edda - Introduction 2



일반적으로 신에다의 저자로 생각되는 이는 스노리 스투를루슨(Snorre Sturleson)과 올라프 흐비타스칼드(Olaf Hvitaskald) 두 사람이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스노라 에다(Snorra Edda), 즉 스노리의 에다(Snorre’s Edda)라 부르고 있다. 이 복잡한 주제에 대하여 상세한 토론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산문 에다를 만드는데 역할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케위세르(Keyser) 등이 제시한 그 이유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신에다의 문법적 부분과 수사적 부분을 쓴 저자는, 하타탈(Hattatal (the Clavis Metrica)) 저자로 그리고 시 자체 뿐아니라 산문 안의 논문의 저자로 스노리S(norre)를 언급한다. 두 번째로, 아르나마그네안(Arne Magnæan) 양피지 두루마리 필사본은, 그 날짜가 13세기나 14세기 초가지 거슬러가는데, 스칼드스카파르말(Skaldskaparmal)의 서문에 다음 글이 들어가 있다. “이 책 중 올라프 쏘르다르손(Olaf Thordsson)이 모은 이 부분은 여기서 끝나고, 이제 스칼드스카파르말(Skaldskaparma)l과 케닝그(Kenningar)가 시작되는데,  최고 스칼드들의 시에서 발견된 바에 따르면, 스노리(Snorre)가 후에 맞붙이느라 고생을 했다.” 세 번째로, 의심할 여지 없이 14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신에다 웁살라(Upsala) 필사본은 작품본문에 똑같은 필체로 쓰여진 다음의 서문을 포함한다 : “이 책은 에다(Edda)라 불린다. 스노리(Snorre)가 다음의 배열 방식으로 편집했다: 가장 먼저 에시르(asas)와 위미르(Ymer)에 관하여, 그 다음 스칼드스카파르말(Skaldskaparmal)과 많은 것들의 명칭, 마치막으로 하타탈(Hattatal) - 이것은 스노리(Snorre)가 하콘(Hakon) 왕과 스쿨리(Skule) 공작에 관하여 쓴 것이다.” 네 번째로, 브레비오레스(Breviores) 연감이라 불리는 책에 1400년에 관하여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문장이 하나 있다. 그 문장은 1241년과 관련있으며, 다음과 같다 : “스노리 스투를루손(Snorre Sturleson)은 레위크홀트(Reykholt)에서 사망했다. 그는 현명하고 아주 많이 배운 사람으로 위대한 지배자였으며, 영리했다. 그는 그 땅에서 왕(노르웨이)의 손아귀로 재산을 가져다 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에다와, 다른 많은 학문적인 역사적 작품들, 아이슬란드의 무용담을 편찬했다. 그는 야를 기수르(Gissur)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레위크홀트 (Reykholt)에서 살해당했다.”

따라서 신에다의 소유권을 이 두 사람이 나눠 가지고 있다는 것에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다. 각각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소유하는지는 또 다른, 해결하기 더 어려운 문제이다. 루돌프 케위세르(Rudolf Keyser)의 의견으로는(이 문제에 대해 더 높은 권위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단어처럼 그렇게 엄격한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스노리(Snorre)가 귈파기닝(Gylfaginning), 브라기의 대화(Brage’s Speech), 스칼드스카파르말(Skaldskaparmal), 하타탈(Hattatal)의 저자 이다.(뭐야, 전부 다 잖아.) 신에다의 이 부분은 따라서 123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도 있다. 물론 구성된  신화 체계가 나온 자료들은 훨씬 더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매 행에서 순수한 에시르(asa) 신앙이 숨쉬고 있는 시, 고에다의 옛 발라의 예언(Vala’s Prophecy)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조금의 의심없이 북유럽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소개되기 전, 또는 아이슬란드가 발견되고 정착이 이루어지기 훨씬 전이다. 따라서 오딘 종교의 종교 체계는 스노리(Snorre) 시대 훨씬 전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 하나의 영속적인 산문 형태로 자리 잡았고, 스노리(Snorre)는 거의 말의 변화 없이 단지 글로 쓰는 일에만 기여했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다.

올라프 쏘르다르손(Olaf Thordsson)은 틀림없이 신에다의 문법적, 수사적 부분의 저자일 것이고, 따라서, 그 시기는 1250년 무렵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알파벳에 관한 논문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케위세르(Keyser) 교수는 그 첫 번째 장은 1150년 무렵, 두 번째 장은 1200년 무렵 쓰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서문과 후기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 썼다. 그것들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300년 무렵 쓰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을 종합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신에다의 신화적 자료는 튜톤민족(Teutonic race)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이 부분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 썼다. 올라프 쏘르다르손(Olaf Thordsson)이 작업한 부분은 적은 영역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스노리 스투를루손(Snorre Sturleson)이 썼고, 아니 아마도 더 잘 기록했고, 케위세르(Keyser)에 따르면, 모두 갖추어진 것은 14세기 초, 1320-1330년 무렵으로, 마침내 서문과 후기를 갖추어 편집되었다.

에다(Edda)라는 이름에 관해서도 많은 학문적 토론이 있어왔다. 어떤 학자들은 고에다의 편찬자로 오랜 기간 알려져 왔던 현자 세문드(Sæmund)의 고향인 오디(Odde)란 단어의 변형된 형태일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에다를 쓰기 시작한 것도 세문드(Sæmund)일 수 있다는 논란이 있었다. 다른 주장은 오드르(óðr : 정신(mind), 영혼(soul))이란 단어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 단어는 시적 용법으로 노래, 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다른 주장은 지식을 의미하는 산스크트(Sanscrit) 단어인 베다(Veda)와 에다를 연결 짓는다. 마지막으로, 이 단어가 실제로 고에다에서 사용되었는데, 증조모(선조 할머니? : great-grandmother)란 의미였고 그 부분을 차용했다는 주장이다. 비그푸손(Vigfusson)(누구? Vigfusson은 Vigfus의 아들이란 뜻이니 이름을 말해 줘야지.)은 이 정의를 채택했는데, 이것은 확실히 과학적이며 시적이다. 우리의 아주 옛 어머니 조상이 자신의 후손에게 지혜가 농축된 종교적 전통을 가르친다는 생각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신에다(또는 운문에다, 스노리의 에다)가 여러사람의 손에 의해 다른 시대에 만들어졌고, 그 제작 목적은 스칼드들에게 안내서를 만들어 주려던 것이라 말하겠다. 에다(Edda)는 서문과 후기 외에도, 노르드 신화의 전말에 관하여 상당한 부분을 알려주는 두 권의 책, 더 긴 한 권(귈파그닝:Gylfaginning)과 좀 짧은 한 권(브라기의 대화Brage’s Speech)을 포함하고 있다. 그 뒤로 스칼드스카파르말(Skaldskaparmal)이 나오는데, 그  안에는 스칼드들이 행한 여러 가지 완곡한 표현에 대한 분석이 시인들에게서 충분한 인용을 하여 모두 설명되어 있다. 시 세 가지 내용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을 스노리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운율 일람인 하타탈(Hattatal (Clavis Metrica))의 저자가 스노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네 가지 논문에 문법과 수사학에 관한 장이 4 개 덧붙여져 있다. 가장 오래된 문법적 논문의 저자는 12세기 중엽에 살았던 쏘로드 룬마스터(Thorodd Runemaster)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세 번째 논문은 분명히, 덴마크 왕 승리자 발데마르(Valdemar)의 궁정에서 얼마간 머물렀던, 학자이며 스노리(Snorre)의 조카인 올라프 쏘르다르손 흐비타스칼드(Olaf Thordsson Hvitaskald)가 썼다.




나름대로 명칭 철자 정리

우리말R.B.Anderson일반적 철자 고대 노르드어
기수르GissurGissurGissur
레위크홀트ReykholtReykholtReykholt
세문드SæmundSæmundSæmundr
스노리 스투를루손Snorre SturlesonSnorri SturlusonSnorri Sturluson
스칼드스카파르말SkaldskaparmalSkaldskaparmalSkáldskaparmál
스쿨리SkuleSkuliSkúli
아르나마그네안Arne-MagnæanArnamagnæan
올라프 쏘르다르손 흐비타스칼드Olaf Thordsson HvitaskaldOlaf Thordarson HvitaskaldÓláfr Þórðarson hvítaskáld
케닝그Kenningarkenningkenning
하콘HakonHaakonHákon
하타탈HattatalHattatalHátta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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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2019

The Younger Edda - Introduction 1


소개 (INTRODUCTION).


튜톤족의 과거 기록은 위대한 세상의 물푸레나무 위그드라실의 가지 중 영어권에서는 지금까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우리의 영웅적 조상의 지식이 옛 튜톤인들의 그렇게 뛰어났던 용기와 진취적 기상, 독립 정신들을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 사이에 살아남게 할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서 자연스레 작동할 것이기에, 이러한 무관심은 더욱 비통하게 느껴진다.

우리 조상의 종교는 우리 민족의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장을 형성하며,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에다의 영어 번역을 대중에게 제공하게 되었다. 고에다 중 순수한 신화적 부분은 브리스틀(Bristol)에서 1797년 A.S. 코틀(A.S.Cottle)이 번역하였고, 전제 작품은 벤자민 쏘프(Benjamin Thorpe)가 번역하여 1866년 런던에서 발행하였다. 둘 다 지금은 절판되었다. 신에다도 마찬가지로  두 개의 영어번역본이 있다- 1842년 다센트(Dasent)가 처음으로, 1847년 블랙웰(Blackwell)이 말레(Mallet)의 "북유럽의 유물(Northern Antiquities)"을 편집하며 포함시킨 것이 그 두 번째이다.(말레(Mallet)가 프랑스어로 쓴 "Introduction à L'histoire du Danemarch où l'on traite de la religion, des moeurs, des lois, et des usages des anciens Danois."를 주교 퍼시(Bishop Percy)가 영어로 번역하여 1770년 "Northern Antiquities"란 제목으로 처음 출판했고, 1847년 블랙웰이 편집, 재출판하면서 운문에다를 번역하여 첨가했다.)  전자는 지금 절판되었고, 후자는 다센트 판의 조악한 모조품일 뿐이다. 둘 다 매우 부족하다. 이 네 권이 우리가 영어로 가지고 있는 모든 에다 문학을 구성한다. 물론, 그레이(Gray), 헨더슨(Henderson), W. 테일러(W.Taylor), 허버트(Herbert), 재미슨(Jamieson), 피곳(Pigott), 윌리엄스(William), 메리 호위트(Mary Howitt) 외 몇몇 사람들이 하나의 시 혹은 하나의 장을 번역한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우리가 지금 독자들에게 영어판을 발표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신에다(또한 스노리의 에다(Snorre’s Edda), 산문에다(the Prose Edda)라고도 불린다.)는 일반적인 원본 출판처럼 다음과 같은 장으로 구성된다.
The Younger Edda (also called , or ), of which we now have the pleasure of presenting our readers an English version, contains, as usually published in the original, the following divisions:

1. 서문
2. 귈피의 속임수(Gylfaginning : The Fooling of Gylfe)
3. 귈피의 속임수 후기
4. 브라기의 대화(Brage’s Speech)
5. 후기
6. 스칼드스카파르말(Skaldskaparmal)(시어법:스칼드(음유시인)의 언어로 된 운문 장절과 명칭 모음)
7. 하타탈(Hattatal:Clavis Metrica) (운율 일람)

일부 판에서는 알파벳, 문법, 화법 등에 관한 6개의 추가 장도 발견된다.

신에다의 중요한 세 가지 양피지 필사본은 다음과 같다.

1.코덱스 레기우스(Codex Regius). 왕의 서(King's Book: Konungsbók) . 주교 브뤼뇰푸르 스베인손(Brynjulf Sveinsson)이 1640년 코펜하겐(Copenhagen), 왕립도서관에 진상하였고, 아직도 그곳이 보관되어 있다.(1971년 4월 21일 아이슬란드 레위캬비크로 반환되어 현재 아르니 마그누손 연구소에서 보관중이다)

2.코덱스 워르미아누스(Codex Wormianus). 코펜하겐 대학도서관.  아르나 마그네안(Arne Magnæan) 모음집에서 찾을 수 있다. 올레 워름 교수(Ole Worm:1654년 사망)의 이름을 땄는데, 학자 아릉그림 욘손(Arngrim Jonsson)이 그에게 선물했다. 올레 워름의 손자 크리스챤 워름(Christian Worm)과 시란드(Seeland)의 주교(1737년 사망)가 아르니 마그누손(Arne Magnusson)에게 선물하였다.

3. 코덱스 웁살리엔시스(Codex Upsaliensis). 이것은 웁살라(Upsala)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위의 두 책과 마찬가지로 아이슬랜드에서 발견되었으며, 존 루그만(Jon Rugmann)에게 주어졌다. 후에 마그누스 가브리엘 드 라 가르디에(Magnus Gabriel de la Gardie) 백작의 손에 들어 가게 되었고,  그는 1669년 웁살라 대학에 이를 기증했다. 이 세 개의 주요 자료 외에도 네 개의 단편적인 양피지 문서와 많은 양의 종이 필사본이 존재한다.

원어로 된 신에다 초판은 1665년 페테르 요하네스 라센(Peter Johannes Resen)이 발행한  그 유명한 “에다 이슬란도룸(Edda Islandorum),”이다. 라틴어로된 번역도 포함하고 있는데, 일부는 라센 자신이, 다른 일부는 마그누스 올라프손(Magnus Olafsson), 스테판 올라프손(Stephan Olafsson), 쏘르모드 토르파손(Thormod Torfason)이 만들었다.

80년이 지난 1746년에서야 요하네스 고란손(Johannes Goransson)의 후원으로 웁살라에서 신에다의 두 번째 판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코덱스 웁살리엔시스를 기본으로 인쇄되었다.

근세에 1818년 라스무스 라스크(Rasmus Rask)가 스톡홀름에서 세 번째 판을 발행했는데, 이것은 아주 온전하고 중요하다. 네 번째 판은 1849년 레위캬비크에서 스베인뵤른 에길손(Sveinbjorn Egilsson)이 발행했다; 다섯 번째 판은 1852년 1월 코펜하겐에서 아르나 마그네안(Arne-Magnæan) 위원회에서 발행했다[1]. 이 다섯 판 모두 오래전 절판되었고, 그 자리는 쏠레이프 욘슨(Thorleif Jonsson)(코펜하겐, 1875)의 여섯 번째 판, 어니스트 윌킨(Ernst Wilkin)(파데르보른(Paderborn), 1877)의 일곱 번째 판이 차지했다. 이 두 가지 모두, 특히 후자는 대단히 중요하며 신뢰할 만하다.

그것들과 더불어, 번역판으로, 다센트(Dasent)의 영어판과 블랙웰 R. 뉘에루프(Blackwell, R. Nyerup)의 덴마크어판(코펜하겐, 1808); 카를 심로크(Karl Simrock)의 (스투트가르트Stuttgart와 튜빈겐Tübingen, 1851) 독일어판, FR. 베르그만(Fr. Bergmann, 파리, 1871)의 프랑스어판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신에다 연구에서 조언을 받은 주요한 권위자 중에는 이미 언급된 이들 외에도, Fr. 디에트리흐(Fr. Dietrich), Th. 모비우스(Th.Mobius), Fr. 파이퍼(Fr.Pfeiffer), Ludw. 에트뮬러(Ludw.Ettmuller), K. 힐데브란드(K.Hildebrand), Ludw. 우란드(Ludw.Uhland), P. E. 뮬러(P.E.Muller), 아돌프 홀츠만(Adolf Holzmann), 소푸스 부게(Sophus Bugge), P. A. 문흐(P.A.Munch)와 루돌프 케위세르(Rudolph Keyser)도 있다. 우리의 소개문과 주석에 있는 자료는 주로 심록과 윌킨, 케위세르의 것을 이용하였다. 우리가 고유의 연구를 할 기회는 없지만, 발행된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연구하였고, 우리가 우리의 연구라 주장한 것은 모두 우리보다 우르드(Urd)와 미미르(Mimer)의 샘에 더 가까이 사는 학자들의 가장 최근이며 가장 철저한 조사 결과를 포함할 것이다. 우리는 에길손(Egilsson)과 욘손(Jonsson), 윌킨스(Wilkins)의 원문 편집본을 번역하였다. 하타탈(Hattatal)과 스칼드스카파르말(Skaldskaparmal)의 대화부분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우리 책이 지금까지 발행된 다른 어느 영어, 독일어, 불어 또는 덴마크 판 보다 더 많은 내용의 신에다로 구성되어있다. 생략된 부분은 아마도 원문으로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를 끌 수 없을 것이다.  에시르(asas)과 아쉬뉴르(asynjes), 세계, 땅, 해, 바람, 불, 여름, 사람, 전쟁, 무기, 배 황제, 왕, 통치자 등등에 대하여 바꿔 말한 것들은 옛 노르드 시의 구문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때나 흥미로울 것이다. 운율열람도 마찬가지 인데, 그 운율열람은 스칼드(Skald)음유시인들이 사용했던 그리고, 그들 시의 표본과 백개의 다른 운율로 쓰여진 스노리 스투를루손(Snorre Sturleson)의 시로 설명되는 비유와 별칭을 포함하고 있다.
(스칼드(Skald:skáld) : 바이킹 시대부터 중세 까지 스칸디나비아 궁정에 소속된 궁정시인)

신에다를 누가 저술했는가에 대하여 많은 학문적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이 까다로운 주제에 관심있는 독자들은 우리가 추천하는 윌킨스(Wilkins)의 수고가 담긴 논문 "Untersuchungen zur Snorra Edda (Paderborn, 1878)", 그리고 P. E. 뮬러(P. E. Muller)의 "Die Æchtheit der Asalehre (Copenhagen, 1811)"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 작품과 밀접하에 연관되어 있는 유명한 두 이름은 의심할 바 없이 스노리 스투를루손(Snorre Sturleson)과 올라프 쏘르다르손 흐비타스칼드(Olaf Thordsson Hvitaskald) 이다. 이 두 사람은 문학에서 뿐만아니라 아이슬란드 정치 역사에서도 두드러진다.

Snorre Sturluson-Christian Krohg
Snorri Sturluson by Christian Krohg
[Public Domain], Link
스노리 스투를루손(Snorre Sturleson)[2]는 1178년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오디(Odde)에 있는, 현자 세문드(Sæmund the Wise : 그 유명한 고에다의 수집가) 손자이며, 저명한 장관인  존 로프스손(Jon Loptsson)의 집으로 오게 된다. 그는 1197년 존 로프트손(Jon Loptsson)이 사망할 때까지 거기서 지내게 된다. 이후 곧 스노리는 부유한 집안과 결혼하고, 곧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저명한 지도자 중의 하나가 된다. 그는 최고 행정관에 여러 번 선출되었으며, 그 나라에서 그와 동등한 부와 명성을 누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와 그의 두 형 쏘르드(Thord)와 시그바트(Sighvat), 그들은 스노리와 비교해도 부와 권력에 크게 뒤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아이슬란드에서 한 때 거의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스노리는 가끔 800에서 900 명의 무장한 사람들을 동반하고, 씽볼스(Thingvols), 알씽그(Althing:아이슬란드 입법부)에 나타나곤 했다.
(예전에 지어진 책이라 고에다의 저자를 세문드라 칭하고 있는데, 지금은 부정되고 있는 주장이다.)

스노리(Snorre)와 그의 형제들은 다른 가족들과 심한 반목을 겪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는 싸움을 하며, 심한 증오를 키우고 있었다. 스노리(Snorre)는 정치인, 행정관으로서 능수능란했고, 웅변가, 스칼드으로서 걸출하였지만, 그의  열정은 하찮았으며, 많은 방식에서 부정직하였다. 그는 야망이 컸고, 탐욕스러웠다. 그는 노르웨이에 자신의 나라를 예속시키려 계획을 세운 첫 번째 아이슬란드인이라고들 하며, 그 연줄로 노르웨이 왕 수하에서 야를(Jarl:스칸디나비아의 귀족 작위)이 되길 기대했던 모양이다.(앗!! 매국노였어)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조카인 스투를라 쏘르다손(Sturle Thordsson)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것을 깨닫고, 조카와 적대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스노리(Snorre)는 이 싸움에서 패배했으나, 스투를라(Sturle)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적과의 싸움에서 그의 적과의 전투에서 쓰러지자, 다시 스노리(Snorre)는 희망의 싹을 키우며, 광범위하고 야심찬 계획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1218-1220년 동안 처음 노르웨이에 가 있게 되는데, 하콘(Hakon)왕과 특히 야를 스쿨리(Skule)그때 노르웨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에게 환대들 받았다. 1237년 스노리(Snorre)는 다시 노르웨이를 방문하여, 믿어지는 것처럼, 야를 스쿨리(Skule)와 함께 반역모의에 합류했다. 1239년 그는 하콘왕에게 복종해야 했으나, 왕의 바람에 반하여 다시 노르웨이를 떠나, 왕에게 큰 불만을 사게 되었다. 1240년 하콘(Hakon) 왕은 스쿨리의 반란을 제압하고, 위험한 반대파를 섬멸하였다. 하콘 왕의 선동으로, 아이슬란드의 몇몇 지배자들이 스노리(Snorre)에 대항하여 연합하였고, 레위크볼트(Reykholt)에서 스노리(Snorre)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1241년 9월 22일에 일어났고, 그때 스노리(Snorre)는 63살 이었다. 스노리(Snorre)는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뛰어난 스칼드이자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역사 기록가로서 헤로도토스(Herodotos)나 투키디데스(Thukydides)와 겨룰 만하다. 그가 쓴 노르웨이 왕의 상세한 역사를 담고 있는 헤임스크링글라는 문명세게 전역에서 유명하며, 에머손(Emerson)은 그 책을 우리 민족의 일리아드 오딧세이(Iliad and Odyssey)라 칭했다.
사무엘 레잉이 1844년 런던에서 이 작품의 영어 번역판을 출판했다. 칼라일의 “초기 노르웨이의 왕(Early Kings of Norway) (런던, 1875)은 헤임스크링글라(Heimskringla)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흐비타스칼드(Hvitaskald)[3]라는 성이 붙은 올라프 쏘르다르손(Olaf Thordsson)은 - 같은 시대의 올라프 스바르타스칼드(Olaf Svartaskald)[4]와 구별하기 위함 - 스노리(Snorre)의 형의 아들이다. 그는 삼촌 스노리(Snorre)만큼 저명하거나 영향력이 있지는 않지만, 13세기 전반기 동안, 자신 모국의 모든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236년 노르웨이를 방문하였고, 같은 해 덴마크에도 갔는데, 발데마르(Valdemar) 왕의 궁정에서 귀빈으로 대접받았고,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240년 그는 다시 노르웨이를 방문하였고, 스쿨리(Skule)에 반대하여 하콘 왕의  명분을 지지하였다. 아이슬란드로 돌아와서 4년 동안 그곳의 최고 행정관으로 집무하였고, 1259년 사망하였다. 그는 아이슬란드의 위대한 음유시인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


[1] 이 작품의 세 번째 권(Volumn)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2] 케위세르(Keyser)
[3] 하얀 스칼드(White Skald)
[4] 검은 스칼드(Black Skald)



철자가 좀 헷갈려서 정리했다.

우리말R.B.Anderson일반적 철자고대 노르르어 철자
마그누스 올라프손Magnus OlafssonMagnus OlafssonMagnús Ólafsson
브리뇰푸르 스베인손Brynjulf SveinssonBrynjolfur SveinssonBrynjólfur Sveinsson
스노리 스투를루손Snorre SturlesonSnorri SturlusonSnorri Sturluson
스베인뵤른 에길손Sveinbjorn EgilssonSveinbjörn Egilsson
스쿨리SkuleSkuliSkúli
스테판 올라프손Stephan OlafssonStefan OlafssonStefan Ólafsson
스투를라 쏘르다르손Sturle ThordssonSturla thordarson.Sturla Þórðarson
시그흐바트SighvatSighvatr
쏘르드ThordÞórðr
쏘르모드 토르파손Thormod TorfasonThormodr TorfasonÞormóður Torfason
쏠레이프 욘슨Thorleif JonssonThorleif JonssonThorleif Jonsson
씽볼스Thingvols

아르나마그네안Arne-MagnæanArnamagnæan
아르니 마그누손Arne MagnussonArni MagnussonÁrni Magnússon
아릉그림 욘손Arngrim JonssonArngrimur JonssonArngrímur Jónsson
아쉬뉴르asynjesasynjurásynjur
알씽그AlthingAlthingi, AlthingAlþingi
에시르asasaesiræsir
올라프 스바르타스칼드 Olaf SvartaskaldOlafr SvartaskaldÓláfr Svartaskáld
올라프 쏘르다르손 흐비타스칼드Olaf Thordsson HvitaskaldOlaf Thordarson HvitaskaldÓláfr Þórðarson hvítaskáld
올레 워름Ole WormOle Worm
요하네스 고란손Johannes GoranssonJohannes Göransson
존 로프트손Jon LoptsonJón Loftsson
페테르 요하네스 라센Peter Johannes ResenPeder Hansen Resen
하콘HakonHaakonHákon
헤임스크링글라HeimskringlaHeimskringlaHeimskring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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