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2024

(인물)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아내들 - 4

 

캐서린 파 (Catherine Parr)

Queen Catherine Parr
Catherin Parr
After Master Joh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출생 : 1512 -1515.
사망 : 1548. 09. 05
혼인 기간 :  1543. 07. 12  – 1547. 01. 28 

헨리8세의 마지막 왕비로 토마스 파 경(Sir Thomas Parr)와 모드 그린(Maud Green)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헨리 8세에게 신임받는 관리였고, 어머니는 캐서린 왕비의 시녀였으며, 캐서린 왕비는 그녀의 대모였다. 캐서린 이란 이름은 아라곤의 캐서린 이름을 딴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가톨릭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어느 시점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일반 귀족 여성과 비슷하게 교육 받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서 계속 공부했다고 한다. 프랑스어, 라틴어, 이탈리어에 능통했고, 왕비가 되어서는 스페인어까지 공부했다.

헨리와 결혼 전 이미 두 번(에드워드 버그 경(Sir Edward Burgh), 3대 라트머 남작 존 네빌(John Nevill, 3rd Baron Latimer))이나 결혼한 경력이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지만, 나이 많은 남편과 결혼해 돌봐야 했지만, 살뜰히 챙겼고(두 번째 남편의 이름이 새겨진 성경을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고 한다.), 사별한 관계로 상당한 유산을 물려 받았다.

 두 번째 남편이 죽은 후 영지인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은총의 순례 때 북쪽에서 고생했던 캐서린 파는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어머니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의 인맥을 이용하여 공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메리의 집에 시녀로 들어가 친분을 쌓았다. 거기서 헨리 8세의 관심을 받게 된다. 늙고 병든 헨리는 자식을 얻을 생각이었기 보다는 두 번의 결혼으로 나이 많은 남편을 돌 본 경험이 있고, 의붓 자식들에게도 살뜰 했던 성품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듯 하다.  

캐서더린은 제인 시모어의 오라비인 토마스 시모어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헨리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왕비에 올랐다. 

헨리의 세 자녀와 모두 잘 지냈으며,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를 교육시키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 복권시키는  3차 계승법령(1543년)을 통과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다. 

개신교 신자였고 그와 관련하여 책도 출간하였다. 영국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 최초의 여성이란다.  상당히 급진적 성향의 개신교들 후원하였기에, 반-개신교 정서를 불러 일으켜서, 헨리 8세를 분노하게 만들었고(헨리는 무늬만 개신교이지 속은 가톨릭이다.), 체포 명령까지 내렸으나, 바로 고개를 수그리고 헨리에게 복종함으로써 화를 면했다.

1544년 헨리가 프랑스로 출정을 나갔을 때는 섭정을 성공적을 수행하기도 할 정도로 정치적 역량도 뛰어났다.  왕이 죽은 후 유언에 따라 정치에는 관여하지 못했지만, 왕태후(queen dowager)로써 제대로 대접 받도록 허락 받았으며, 엘리자베스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6 달 후 제인 시모어의 오라비인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했는데,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헨리가 죽은 후 너무 빨리 하는 바람에, 메리와 에드워드는 매우 불쾌해 했다고 한다. 35살에 4번의 결혼 중 처음으로 임신을 하게 된다. 이 기간 토마스 시모어는 엘리자베스에게 흑심을 보였는데(잠옷 입고 엘리자베스에게 가서 간지럼을 태운다거나, 엉덩이를 때린다거나 하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상황이 극한에 치닫기 전까지는 캐서린도 그냥 묵인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엘리자베스를  안토니 데니 경(Sir Anthony Denny)의 집으로 보냈다.(토마스 시모어가 인물이 좋았다는데, 그 때문인지 엘리자베스도 연애 감정까지 갔는지 모르지만, 호감을 가졌었다고 한다.( 토마스 시모어 나쁜 놈. 엘리자베스는 겨우 14살 이었다.) 메리는 선견지명이 있었는지(새엄마의 이른 재혼으로 화가 나서라지만), 캐서린이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하자 엘리자베스에게 당장 그 집에서 나오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캐서린 파는 토마스를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토마스는 그리 사랑하지 않았고, 야심만 컸던 모양이다. 캐서린과 결혼 하기 전 이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했었지만 뜻 이루지 못했고, 캐서린이 죽은 후 또 엘리자베스랑 결혼 하려고 했으나, 데니 경에게 보내지기 전의 사건으로 캐서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거절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6세의 섭정 자리를 얻으려고 무리하다가  결국 반역으로 처형당했다.  

1548년 캐서린은 첫 딸이자 외동딸인 메리 시모어(Mary Seymour; 의붓 딸인 메리의 이름을 땄다)를 낳고  산욕열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출처 : Wikipedia




그렇다면 헨리 8세는 어떤 아내를 제일 사랑했을까

헨리는 공식적으로 제인 시모어를 제일 사랑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제인 시모어가  심기를 거슬렀을 때, 앤 불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거할 수 있다고 협박한 것을 보면, 그렇게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 협박은 앤 불린이 결백한데도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래 살아서 헨리의 심기를 거스릴 일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 지 모른다.(하지만, 제인 시모어는 순종적인 여인이었고, 아들이 있으니 죽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결국 그렇게 원하던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그 난리를 피웠기에, 그녀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결혼 3 년 만에 죽여? 처음에 사랑에 빠졌을 지는 모르나, 내 눈에는 그 근원이 소유욕으로 보인다. 앤을 갖지 못해서 집착했던 것이고, 가지고 난 다음에는 아들 후계자를 낳는 목적을 이루어 주지 못하니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렇게 찬사를 보냈던 캐서린 하워드의 경우는, 49세 아저씨가 17(또는 16)살 소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라...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랑했다면, 단지 결혼할 때 처녀가 아니었다고 죽이지 않는다. 설령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추방할지언정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젊은 여인에 대한 잠시의 미혹이었다 본다.

클레페의 앤은 성적 이끌림은 전혀 없었지만, 호감은 있었던 사이. 헨리도 인정한 사랑하지 않은 사람.

캐서린 파와 결혼했을 당시 이미 헨리는 부부관계를 할 수 없을 건강 상태였다고 학자들은 본다. 아마도 사랑이나 성적 이끌림 보다는, 나이 많은 남편들과 살았던 캐서린 파에게서 안정감을 찾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현명하며, 성숙하고 너그러운 성품이고, 전 남편들의 의붓 자식들에게도 잘 했으니, 자기 자식, 특히 에드워드 6세를 잘 키워 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고, 도전 받는다 싶으면 가차 없었다. 캐서린이 현명해서 죽음을 벗어났지, 앞의 부인 같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결혼할 당시 아라곤의 캐서린은 24살, 헨리 8세는 18살 이었다. 헨리 7세가 죽기 전, 결혼할 수 있는 나이인 14살이 되었을 때, 이미 결혼을 거부 했었으니, 결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결혼했다. 바람을 피우기는 했지만, 월경이 끊기기 전에는 꾸준히 아라곤의 캐서린을 찾았다고 한다. 기록에는 그 둘의 사이가 유별나게(unusual) 좋았다고 되어 있단다. 결혼 초기 헨리가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아주 깊이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프랑스로 출정 나가면서 섭정을 맡길 정도로 신뢰도 했고, 캐서린은 침략한 스코틀랜드를 격퇴함으로서 그 신뢰에 답해 주었다. 여러 번의 사산을 겪으면서 둘 사이가 서먹해지기도 했지만, 헨리는 겉으로 아들을 낳지 못한 것에 대하여 캐서린을 비난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 블런트와 사생아를 낳은 것도 1519년, 캐서린이 마지막 아이(여섯째 혹은 일곱째)를 사산한(1518년) 이후이다.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망가진 관계이지만, 시작은  아직 세상 풍파 격지 않은 막 성년에 접어드는 순수한 18살 청년의 6살 연상의 여인에 대한 낭만적 사랑이었다 본다.  

그래서 내가 본 헨리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는 아라곤의 캐서린이다. 


5/27/2024

(인물)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아내들 - 3

 

클레페의 앤 (Anne of Cleves)

Anne of Cleves by Hans Holbein the Younger, c. 1540s?
Anne of Cleves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출생 : 1515.
사망 : 1557. 07. 16
혼인기간 :  1540. 01. 06  – 1540. 07. 12

클레페의 공작 요한 3세(John III, Duke of Cleves)와 율리히-베르크의 공녀 마리아(Maria, Duchess of Jülich-Berg)의 딸로 태어났다.. 

가톨릭 교회의 압박에 저항하기 위한 정치적 동맹의 필요성을 느꼈던 헨리는, 제인 시모어가 사망한 뒤 2 년 후 1539년 3월 부터   서부 독일의 루터교 수장인 윌리엄(William,  Duke of Jülich-Cleves-Berg)과  동맹을 맺기 위해 그의 여동생인 앤과 정략 결혼 협상을 시작했다. 그런데 가족 간의 종교가 달라서 그녀의 어머니는 엄격한 카톨릭 신자였고, 앤도 가톨릭 신자였지만 결혼하며 개종하였다.(혼인 무효 후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종교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인듯.

사실 이전 부터 재혼하려 했지만 헨리가 주제 파악 못하고 미인만 고집했고, 그의 아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소문이 났기에 빨리 이루어지지 못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Christina of Denmark)도 헨리 8세의 뫙비 후보자 목록에 올랐었다. 그러나 헨리가 아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이미 유럽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지라, '내가 머리가 두 개 있다면, 하나는 영국 국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라 말하며 거절했다.

이 때는 아들도 얻은 후 인지라, 성적 매력보다는 정략적 결혼을 추진하려 했는데, 여러 초상화들 중  앤이 마음에 든 헨리는 결혼을 결정했으나, 영국에 도착한 앤을 보고 실망한 헨리는 그녀가 말같이 생겼다며 불평을 했다. 

일설에 따르면 헨리8세가 클레페의 앤을 처음 부터 싫어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공식적인 만남이 있기 전, 헨리  8세는 아직도 젊었을 때처럼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몰래 변장을 하고 앤 앞에 나타나 추파를 던졌는데, 누구인지 모르는 앤이 당황하여, 뚱뚱한 중년 남자의 접근을 거절하자, 혼자 망신 당했다고 생각해서, 공식적으로 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녀에게 못생기고 냄새가 난다며 모욕했다는 말이 있다. 

클레페의 앤은 제인 시모어와 마찬가지로 궁정 교육은 잘 받지 못했고(영어에도 서툴었다고), 수예에 뛰어났다. 성품도 온화하고 도덕적이며 온순하고, 아주 순진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묘사한 기록에 의하면, 키도 크고 날씬하며 금발에 사랑스런 얼굴을 하고 있다고 되어있다.  

헨리는 앤과 결혼하기 싫었지만, 정치적 정략 결혼이었기 때문에 마지 못해 받아들였다. 결혼을 했어도 부부관계는 하지 않았다. 헨리는 크롬웰에게 앤을 예전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단다. 헨리는 밤에 자기 전에 손을 잡고 앤에게 키스하며 잘 자라 말하고, 아침이 되면 또 잘 잤냐고 키스하며 인사를 했을 뿐이었단다(앤에게서 성적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헨리는 앤의 시녀 였던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에게 반해, 앤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일방적으로 앤에게 이혼을 통보하며, 궁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헨리와 앤이 부부관계를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을 적법하게 무효화할 수 있었다.(같은 이유로 아라곤의 캐서린이 아더 튜더와 결혼 했었지만, 헨리 8세와 다시 적법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

자식도 없었던 앤은 혼인 무효에 동의했고, 이 결혼을 추진했던 크롬웰은 이 일이 반대파에게 빌미가 되어 표적이 되어 반역으로 처형당했다. 후에 헨리는 클롬웰의 처형을 후회했단다. (클레페의 앤이 혼인 무효에 동의해 주지 않았어도 그녀의 오빠인 윌리엄이 정치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헨리는 그녀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교황청과 대립하는 와중에 개신교 국가하고도 척을 지게 될 테니.)

앤은 영국에 영지(앤 불린 가문이 소유했던 히버 성(Hever Castle)을 포함하여)를 받고, 이전 왕비로서 재정적 지원도 충분히 받았으며, 헨리는 순순히 혼인무효에 동의 해준 앤을 자신의 '사랑하는 누이'라고 부르며 아꼈단다.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된 다음 윌리엄 율리히-클레페 공작은 헨리에게 재결합할 것을 요구했지만, 헨리에게 거절 당했단다.(헨리 8세가 어떤 인물인 줄 알면서 다시 결혼하라고 하다니, 오빠가 못됐다.)

앤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살았다. 사망 원인은 암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헨리 8세와 끝까지 사이도 좋았고, 평생 큰 걱정거리 없이 살았던 사람이다.


캐서린 하워드 (Catherine Ho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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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rine Howard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그림 제대로 찾은 것 맞지? 왜 이렇게 나이들어 보이냐?)
출생 : 아마도 1523
사망 : 1542. 02. 13
혼인기간 :  1540. 07. 28  – 1541. 11. 23

에드먼드 하워드(Edmund Howard)와 조이스 컬페퍼(Joyce Culpeper)의 딸이며 앤 불린의 사촌이다. 

아버지가 2대 노퍽 공작(Duke of Norfolk) 토마스 하워드의 아들이었지만, 맏아들이 모든 영지를 물려 받아 그다지 부유하지 자라나지 못했다. 궁에 들어가서는 첫째인 3대 노퍽 공작 토마스와 둘째인 에드워드는  왕의 신임을 얻으며 지냈지만, 에드먼드 하워드는 공작의 아들이라 자존심만 세고, 사치스럽고, 입도 험한데다가 행동도 불량해,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다.

재산 때문인지 미망인 이며, 자식도 여럿 있던 조이스 컬페퍼와 결혼 했으나, 제 버릇 못 버린다고, 도박 중독에 까지 걸려, 처자식 놔두고 잠적하곤 했다. 에드먼드 하워드는 앤 볼린이 왕비에 오르며 그 덕으로 관직에 올랐지만, 불성실한 근무 태도에 병까지 얻어 해임되었다 한다.  

캐서린 하워드는 어머니는 1528년에 죽고 아버지는 두 번 재혼하며, 나 몰라라 했기 때문에, 부모의 돌봄을 거의 받지 못했고, 이모 할머니이자 의붓 할머니인  아그네스 하워드(Agnes Howard, Dowager Duchess of Norfolk)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는 공작 부인이 후견인으로 있는 귀족이지만 가난한 친척들의 자녀들이 많이 있었는데, 부인은 대부분의 생활을 궁정에서 보냈고, 피후견들의 양육이나 교육에 직접적으로 관하여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캐서린 하워드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거의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고, 순진했지만, 발랄 하고 아주 자유 분방하였다. 그곳에서 헨리 매녹스(Henry Mannox)란 음악교사를 만나 사귀었지만, 진짜 연인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매녹스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초반, 캐서린은 10대 초반 이었다 하니,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고, 나이 많은 남자의 순진한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성추행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매녹스와 헤어진 다음 캐서린은 공작 부인의 비서인 프란시스 더햄(Francis Dereham)과 사귀었는데, 진짜 연인으로 발전하여, 서로 남편과 아내로 부르기 까지 하였고, 더햄이 부재 중일 때는, 캐서린에게 재정 관리 까지 맡기는 등 거의 정말 아내로 대접했다고 한다. 그들은 결혼하기로 사전 계약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1539년 공작 부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둘의 관계는 끝나고 더햄은 아일랜드로 추방되었다. 

이후 캐서린은 삼촌인 토마스 하워드가 앤 클레페의 시종으로 궁에 들여 보냈다. 꽃다운 나이 16 살의 캐서린은 궁에 들어가자 마자 곧 헨리 8세의 눈에 들게 되었고, 그곳에서 먼 친척인 토마스 컬페퍼(Thomas Culpeper)를 만났다. 

클레페의 앤과 결혼했지만 헨리 8세는 앤에게는 관심이 없고 점점 캐서린 하워드에게 관심을 가졌다. 헨리는 캐서린 같은 여성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애정을 보였다. 선물 공세를 펴며 그녀를 ‘가시 없는 장미’, ‘여인 중 아주 귀한 보석’이라 칭찬했다. 삼촌인 토마스 하워드는 권력을 가질 욕심에 헨리의 아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면서도, 캐서린 하워드를 왕비로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클레페의 앤과의 결혼이 무효가 된지 19일 만에 결혼 했는데,  이 때 헨리8세는 49세,  캐서린 하워드는 17(아마도) 였다. (메리 1세가 1516년 생이다.) 

캐서린은 왕과 결혼하기 전 이미 잘생긴 청년인 토마스 컬페퍼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헨리 8세가 아픈 다리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그녀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이 더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그 둘의 사이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토마스 컬페퍼가 무서운 헨리 8세의 존재에도 캐서린의 애정에 응답한 이유는 아마도, 건강이 나쁜 헨리 8세가 죽은 후 권력을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그리고 그 둘을 부추긴 것은 앤 불린이 조지 불린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헨리에게 말한 조지 불린의 아내 제인 파커였다(미친년이네.).

캐서린의 결혼 전 행실이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귀에 들어가고 왕에게도 알려진다. 헨리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결국 조사를 지시한다. 크랜머 주교는 캐서린과 더햄이 사전 계약을 하고 거의 부부같이 지낸 것이 밝혀지면, 결혼 전 관계는 간통이 아니고,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무효가 되므로, 그 둘은 추방되고 헨리 8세만 망신 당하는 선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했단다.(설마 그럴 리가. 주교는 공포에 사리 분별 못하는 10대의 어린 왕비를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조사 과정에서 더햄은 캐서린과의 과거 관계를 인정했으나, 왕과 결혼 후에는 어떤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했으나, 캐서린은 과거 관계를 끝까지 부정하였다.  그러던 중 캐서린이 컬페퍼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발견되며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달았다.  컬페퍼는 캐서린과 성관계를 가질 의향은 있었으나, 실제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고 했고, 캐서린도 불륜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연애편지의 내용이 너무나 애틋하여, 왕이 믿게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컬페퍼와 더햄은 반역죄로 각각 참수형, 교수척장분지형으로 처형당하고, 캐서린도 1542년 2월 10일 참수 당했다. 캐서린이 죽으면서 ‘여왕으로 죽지만, 컬페퍼의 아내로 죽고 싶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사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왕을 배반한 것에 대해 ‘천 번 죽어 마땅하다’며 용서를 빌었으며, 또 가족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 줄 것과,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단다.  이번엔 제인 파커도 처형되었다.


출처 : Wikipedia

5/23/2024

(인물)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아내들 - 2


앤 볼린(Anne Bole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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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Boleyn
English school,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출생 : 확실하지 않음. 1501년 또는 1507년 
사망 : 1536. 05. 19
혼인기간 :  1533. 05. 28 – 1536. 05. 17

토마스 불린(Thomas Boleyn, Earl of Wiltshire)과 엘리자베스 하워드(Elizabeth Howard) 의 딸로 태어났다. 토마스 불린은 앤이 헨리 8세의 총애를 입으면서 월트셔 백작(Earl of Wiltshire)의 작위를 얻었다. 출생 시기가 정확하지 않는데, 당시 자료를 종합해 보면 1507년이 더 유력한 모양이다.

앤의 아버지 토마스 불린은 외교관으로 일했는데, 네덜란드를 다스리던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의 신뢰를 얻었고, 그녀는 앤을 아주 예뻐해서 아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513년 부터 자신의 집에서 여러가지 궁중예법을 가르쳤다. 

1514년 헨리 8세의 누이인 메리가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하게 되자 앤은 메리 왕비의 시녀가 되었고, 이후 루이 12세의 딸이자 메리의 의붓딸인 프랑스의 클로드의 시녀로 7년간 프랑스의 궁에 머물렀다. 여기서 프랑스어를 완벽히 익혔고, 예술 패션, 문학, 음악 종교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여러가지 지식을 익혔다. 춤도 아주 잘 추었으며, 그 당시 보기 힘든 새로운 모습의 여성이었다. 

1521년 아일랜드 계 친척인 제임스 버틀러(James Butler)과 결혼하기 위해 귀국했다. 이 결혼은 남자 상속자 없이 죽은 7대 오몬드 백작(Earl of Ormond)이 딸들(딸 중 하나가 마가렛 불린으로 앤의 할머니이다)에게 작위와 영지를 남겼는데, 3대 오몬드 백작의 후손인 피어스 버틀러 경(Sir Piers Butler)이 자신이 정당한 상속자라 주장함으로서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상속 싸움 때문에 아일랜드와 전쟁까지 일어날 까봐 걱정한 헨리 8세가 중재에 나서기까지 했으나, 결혼은 깨져 버렸다. (토마스 불린이 오몬드 백작 작위를 욕심 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이후, 1522년 캐서린의 시녀로 궁에 들게 되었다. 비밀리에 헨리 퍼시(Henry Percy와 약혼 했지만, 슈루즈베리(Shrewsbury) 백작의 딸 메리 탈봇(Mary Talbot)과 아들을 결혼 시키려던 퍼시의 아버지인 헨리 퍼시(Henry Percy, 아들과 이름이 같다.) 노섬벌랜드 백작(Earl of Northumberland)이 기사의 딸인 앤의 신분이 낮다며 반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는 앤에게 관심 있던 헨리가 약혼 사실을 이를 알고 결혼을 깨버렸다는 말도 있는데, 많은 영화에서 이 뒷이야기를 차용했다.)

궁정에서 앤은 우아하고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 부르며 악기도 잘 연주 했다고 한다, 지적이고 통찰력도 우수하여 대화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야심도 있는 활력이 넘치는 여성이었기에 어떤 사교 모임에서든 주목을 받았다.

1526년 부터 헨리 8세는 앤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고, 그녀를 정부로 삼으려고 했다. 그 때 이미 그는 앤의 누이인 메리 불린(Mary Boleyn)을 정부로 삼은 적이 있었다. (메리는 1520년  윌리엄 캐리(Willian Carey)와 결혼 했다. 그들의 자식 중 1524년에 태어난 캐서린 캐리(Catherine Carey)와 1526년에 태어난 헨리 캐리(Henry Carey)가 헨리 8세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헨리 8세는 인정하지 않았다. (헨리 8세의 자식은 일찍 죽거나 후손을 얻지 못했는데, 저 둘은 각각 16남매, 13남매를 낳았으니 소문이 맞지 않을 확률이 더 커 보인다. 그냥 왕과 왕비의 이름을 따라 이름 지은 듯 하다.)

밀고 당기는데 선수였던 앤은 정부가 되기를 거부했고, 몸이 달은 헨리 8세는 그 때부터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거부하자,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를 세웠다. 헨리는 교황청과 관계를 끊었어도, 속은 여전히 카톨릭 신자와 다름 없었지만, 앤 볼린은 개신교 신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후 개신교의 교세를 늘이는데 여러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휘둘렀다. 앤과 결혼 생활 중 헨리 8세는 많은 카톨릭 교도들을 처형했다.

1531년 헨리는 캐서린을 궁에서 쫓아내고 앤에게 왕비의 방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는데, 백성들은 여전히 캐서린을 지지하고 동정하였기에 앤 불린은 미움을 받았다. 

앤과 헨리는 1533년 1월 25일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5일 후 캔터베리(Canterbury) 주교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 무효화를 선언함으로서, 앤과 헨리의 결혼은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왕비로서 대관식을 치루고, 9월 7일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다. 헨리 8세는 딸이어서 실망했지만, 건강한 아이를 얻었으니 아들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엘리자베스를 아꼈다. 그러나 1번의 상상 임신, 2번의 유산을 겪으며 헨리 8세의 사랑을 잃게 되었다. 

앤의  활동적이며 당돌한 성격은 결혼 전에는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결혼 후에는 질투가 심하고 너그럽지 않으며,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이혼하는 부부들을 보면  흔히 결혼한 이유가 이혼하는 이유가 된단다.) 헨리와 마찬가지로 사치스러워서, 헨리의 폭정에 대한 비난이 앤에게도 쏟아졌다. 결정적으로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대중은 완전히 그녀에게 등을 돌린다. 

앤과 헨리는 캐서린과 메리에게도 매우 못되게 굴었는데, 캐서린이 죽자 그 다음날 영국에서 기쁨과 축하의 상징인 노란 옷을 입고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앤은 메리와는 화해를 하려 했지만, 메리가 거부했고(당연하지, 내 엄마를 쫓아낸 아빠와 바람난 여자를 누가 받아들이나), 화가 난 헨리와 앤은 메리가 더 이상 공주가 아님을 자각하도록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삼았다고 한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어떤 미래를 맞을지 잘 알았기에, 유산을 반복하며 초조해진 앤은 더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변했는데, 그 사이 헨리는 앤의 시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에게 눈길을 주게 된다. 앤이 제인 시모어를 질투하자(캐서린은 헨리의 여자 문제에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남아있던 정마저 떨어진 헨리는 앤이 자신을 유혹하려 속임수나 마법 사용해서 결혼하게 되었다고까지 말하며 이혼을 준비한다.

앤이 몰락한 이유를 크롬웰이 그녀를 정치적인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모략을 세워 제거했다는 말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헨리 8세의 변덕으로 본다. 설에 따르면, 아들을 임신하지 못해 절박해진 앤이 오라비인 조지 불린(George Boleyn)을 침실로 불러들였는데, 차마 관계는 맺지 못했고, 조지 불린은 방을 떠났지만, 남편과 사이가 아주 나빴던 그의 아내 제인 파커가 헨리 8세에게 일렀다고 한다. 왕의 총애 말고는 믿을 것이 없었던 앤은 가족에게서도 지지 받지 못했다. 

어쨌든, 헨리 8세는 앤을 조지 불린과의 근친상간, 그 외 5 명의 남자들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1536년 5월 19일 처형했다. (아라곤의 캐서린이 병으로 사망한 지 불과 다섯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왕비의 간통은 왕의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들을 왕 위에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반역이었다. 화형으로 죽이려다가 왕비였었던 것을 감안해서 참수형으로 끝냈다고 한다. 앤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제인 시모어(Jane Seymour)


Hans Holbein the Younger - Jane Seymour, Queen of England - Google Art Project
Jane Seymour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출생 : 아마도 1508
사망 : 1537. 10. 24
혼인기간 :  1536. 05. 30  – 1537. 10. 24

존 시모어경(Sir John Seymour)과 매저리 웬트워스(Margery Wentworth)에 태어났으며, 출생시기는 정확하지 않은데, 1504년에서 1509년 사이로, 일반적으로 1508년으로 추정한다. 

캐서린이나 앤처럼 수준 높은 교육은 받지 못했고, 기본 교육만 받아 글을 쓰고 읽을 줄은 알았지만,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녔다거나, 정치적 수완이 있다거나 하지 않았다. 수예나 가정을 돌보는 일에 능숙했다고 한다. 가족들도 궁정에 들여 보내기 보다는 그냥 평범한 사람과 결혼 시킬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설에 의하면, 아버지 존 시모어가 며느리와 불륜을 행하는 추문을 일으켜서  혼삿길이 막혀버렸다는 말이 있다. 

그 때문 인지는 모르지만, 뒤늦게 궁정으로 들어가 1527년 경부터 캐서린 왕비(이 때는 이미 헨리가 캐서린을 거들떠 보지도 않을 때라 야심을 갖고 가족이 시녀로 들여 보냈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의 시녀가 되어 그녀를 섬기다가,  앤이 왕비가 된 다음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외모는 아주 미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며, 체구도 아담하였다.성격은 예의 바르고 온화하며, 정숙하고 유순하였다. 다툼이 있으면 중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성격상 캐서린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냥 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앤 앞에서 헨리가 선물한 목걸이를 하고, 그것을 만지작 거리며 질투심을 자극하기도 했단다. 또 헨리가 잠자리를 요구 하자 '자신의 명예는 천 명의 목숨으로도 손상시킬 수 없으며,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하며  완곡히 거절했고, 헨리는 그 정숙함에 반해 더 좋아하게 되어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되었다 한다. (어떤 이들은 제인이 캐서린 왕비를 매우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었고, 앤이 캐서린에게 못되게 구는 것을 다 봐왔기 때문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마음 속에서 앤을 왕비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앤이 한 짓을 그대로 그녀에게 되돌려 준 것 이라고도 말한다.)

앤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헨리는 앤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에게 관심을 보인다. 이를 눈치 챈 제인 시모어의 아버지와 오라비들은 그녀를 왕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애썼다는 말도 있다. 

헨리와 제인 시모어는 앤이 처형 당한 당일 약혼하고, 10 일후 결혼하였다. 

온화한 성품이지만, 여왕으로 서는 엄격하고 단호해서, 앤이 사치스럽게 꾸민 궁정도, 소박하게 바꾸고 호화로운 파티 등도 삼가하였다.  정치에는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다만, 보수적이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제인은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 참여자에 대한 사면을 헨리에게 부탁했었는데, 헨리에게 앤의 전례를 들며 협박당했다.).

캐서린 왕비를 존경하고 동정했으며, 메리도 안타깝게 여겨, 공주로서의 신분을 회복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적어도 헨리와 메리의 관계를 조금 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메리는 자신을 위해 노력해주는 제인에게 감사했고, 또 제인이 가톨릭 신자이기도 해서 더 호의적이었다.

제인 시모어가 "복종하고 섬기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고, 온화하고 유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헨리가 캐서린과 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가까이에서 다 보았고, 가톨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사면을 호소한다거나, 미워하고 있던 딸 메리를 변호하고 화해시키려 하는 등의 행동을 보면 나름 줏대와 용기가 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결혼 한 다음 해인 1537년 임신을 하고 10월 12일 2박 3일의 산고 끝에 에드워드 6세를 출한하였다.   15일에 행해진 에드워드 6세의 세례식에도 모습을 보여 잘 회복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출산 12일 만인 24일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헨리의 왕비 중 유일하게 왕비로서 장례식을 치른 여인이다. 

앤이 처형당한 당일 제인과 약혼 했던 헨리는 제인이 죽은 후 세 달 동안 검은 옷만 입고 지냈으며, 2년도 더 지난 후 클레베의 앤(Anne of Cleves)와 혼인하였다.

헨리는 제인을 모든 아내 중 가장 사랑했다 말했고(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단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헨리에게 소중했던 것이지 가장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단다.), 죽은 뒤 제인 옆에 묻혔다. 

대중 매체에서 앤 불린을 예쁜 여배우가 맡아, 매력적인 여인에 헨리 8세의 피해자로만 보여주고, 아라곤의 캐서린과 메리 1세에게 못되게 군 것은 생략해 버리니,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외국 댓글을 보면 제인 시모어가 앤 불린을 죽이고 왕비가 되었다고 악녀라하는 사람도 있던데, 왕비를 폐위하는 전례를 만들게 부추긴 것이 앤 불린이다.  왕비 자리 욕심 내지 않고, 자식을 왕 만들 욕심 내지 않고, 처음 헨리 8세가 원한대로 정부로 지냈으면 총애 받으며 잘 지내다가, 나중에 왕이 싫증 내면 다른 남자 만나 결혼해서 잘 살았을 것이다.(다른 정부들도 다 그랬으니.) 아들을 낳았으면, 헨리 피츠로이 처럼 공작 작위를 내렸다가, 적법한 후계자로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야망을 목숨과 바꾸었다. 제인 시모어는 앤과 같은 방법으로 왕비가 되었을 뿐이다.

규칙을 처음에 깨기는 어렵지만, 한 번 깨고 나면, 그 다음 다시 깨기는 쉬운 법이다.  앤이 뒷배경이 없어서 죽었지. 혼인 무효에 동의해주지 않고 7년을 버틴 캐서린을, 헨리와 앤이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캐서린 뒤에 있는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교황청과 그 영향 하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무서워서 못 죽였겠지. 또 순종적인 아라곤의 캐서린도 혼인 무효 요구에 그렇게 강하게 저항했는데, 성격 강한 앤 불린은 어떻게 할 지 누가 봐도 알 수 있느니 죽여버렸을 것이다.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촌인데, 제인 시모어도 그 둘과 증조할머니가 같다(역시 관련 없는 친척은 뺐다). 증조 할머니가 첫 남편인 틸니(Tilney)와 일찍 사별하고 재혼했다.


출처 : Wikipedia

5/21/2024

(인물)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아내들 - 1

헨리 8세 (Henry VIII)


출생 : 1491. 07. 28
사망 : 1547. 01. 28
재위기간 : 1509. 04. 22 - 1547. 04. 28


영국의 왕이며, 아일랜드의 군주로, 투더(Tudor)왕조의 다섯 왕 중 두 번째 왕.
여섯 명의 아내를 맞이하는 과정이 파란만장해서 더 유명하다. 

After Hans Holbein the Younger - Portrait of Henry VIII - Google Art Project
헨리 8세
After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형인 아더 (Arther, Prince of Wales)가 15세의 나이로 죽자, 10살의 나이에 그 뒤를 이어 왕세자가 되었다.

젊어서는 아주 잘생기고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아주 낭만적인 사람이어서 시를 쓰는 작가이기도 하고 작곡을 하기도 했단다.(영국 민요인 푸른 옷 소매를 악곡으로 만든 것이 헨리 8세다.) 잘 교육 받았고 언어 능력도 뛰어나 프랑스어, 라틴어, 스페인어에 능통했다. 신앙심도 두터웠으며, 대단히 활동적이어서 사냥도 좋아 하고 테니스도 잘 쳤다고 한다.

여성 편력이 있기는 했지만(사실 여성편력 없는 왕은 거의 없지) 첫 번째 아내와 아주 사이좋게 잘 지냈으나 아내가 나이가 들어 아들을 낳을 수 없게 되자 여성 편력이 매우 심해지고, 건강한 사생아 아들을 낳게 되자, 적법한 아들을 얻는 것에 대한 집착이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 

원래 가톨릭 신자였으나 앤 불린(Anne Boleyn) 결혼하려고, 첫 번째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의 결혼을 무효화 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수장령을 선포하며, 영국 국교회를 창설하였다.(교황과 단절되기만 했지 전례와 교리는 카톨릭 교회의 그것과 같았고, 유럽의 개신교와는 달랐다. 제대로 된 종교개혁은 것은 엘리자베스 1세 때였다.)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반에 올라, 수녀원과 수도회를 해산하고 그 영지와 재산을 몰수. 교황에 의해 파문 당했다.

교황의 영향력을 없애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영국 헌법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반대 의견이 나올 때마다, 반역, 이단이란 명목으로 재판도 없이 수 많은 이들을 처형하였다. 토마스 크롬웰처럼 처음에 총애하던 신하들도 눈밖에 나게 되면 가차없이 처형하였다. 

종교 개혁으로 수도원에서 몰수한 재산과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금, 이전에 교황청에 지불하던 돈을 모두 왕실 수입으로 전환하여 국고는 풍부해졌으나 개인적인 사치와 주변 국가들, 특히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코틀랜드와의 쓸데없는 전쟁으로 재정은 고갈되었다.

하지만 왕실 해군에 크게 투자하여 5척 이였던 군함을 53척으로 증가시켰고, 웨일즈를 영국으로 합병했으며, 아일랜드의 왕관법에 따라 아일랜드를 왕으로 통치한 최초의 영국 군주였다. 

그 시대에는 헨리 8세를 매력적이며 야심있고 업적이 많은 왕으로 생각했다. 영국 왕 중 가장 카리스마 있는 왕 중 하나이며, 그의 치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생활이나 정치적 관계는 잔인하고, 변덕스러웠지만, 국가를 강력하게 만들고, 왕권을 강화하여 조정과 지방의 대소사를 왕이 직접 돌보며, 제대로 된 군주정치를 구현하고, 빈민과 실직자를 구제하여, 귀족들 생활에 별 관심 일반 백성들에게는 평판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고 애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1536년 낙상하여 심한 부상을 당했는데, 이 때 머리를 다쳐 뇌손상이 일어나 성격이 변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있다. 다리도 크게 다쳤는데, 영 회복되지 않았다고 하며, 거의 움직이지를 못해 심하게 뚱뚱해지고, 다리에 궤양이 생겨 고름을 내뿜는 등 건강으로 고통 받았다.
말년에 허리둘레가 140cm에 이르렀다. 1547년 비만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말년에는 호색한에 이기적이고 편집증적이며, 폭압적인 군주로 묘사된다.
아들 에드워드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아내는 모두 영국 국왕 에드워드 1세의 후손이다. 가계도가 워낙 복잡해 배우자들과 상관없는 친척들은 모두 빼버렸다. (헨리 8세가 아들 얻기가 어려웠던 이유가 혹시 근친에 의한 유전적 결함???)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Catalina de Aragón)


Catherine of Aragon (1485-1536)
Catherine of Aragon
by Lucas Horenbou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출생 : 1485. 12. 16
사망 : 1536. 01. 07
혼인기간 : 1509. 07. 11 - 1533. 05. 23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Isabella I of Castile) 와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 II of Aragon)의 딸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이다. 왕실에서 왕녀로 엄격히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캐서린과 헨리 7세는 고조할아버지(John of Gaunt)는 같지만, 고조할머니는 다르다.  존 곤트는 세번 결혼 했는데 첫 번째 결혼인 영국 왕족 랭커스터의 블랑쉬(Blache of Lancaster)와 결혼하여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헨리 4세가 태어났고 헨리 6세까지 이어진다.

블랑쉬가 죽은 후 곤트는 카스티야의 콘스탄체(Constance of Castile)과 결혼하며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 서열도 얻었다. 아라곤의 캐서린의 고조 할머니이다. 

곤트는 콘스탄체와 결혼 한 상태에서 캐서린 스윈포드(Katherine Swynford)와 바람을 펴 자식을 얻었는데, 이들에게 뷰포트(Beaufort)란 백작 작위를 내려 가문을 형성한다. 헨리 7세는 마가렛 뷰포드(Margaret Beauford)와 에드먼드 튜더(Edmond Tudor)의 아들로 튜더 왕조의 첫번째 왕이다. 콘스탄체가 죽은 후 곤트가 캐서린 스윈포드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뷰포드 가문이 왕족이 되기는 했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가질 수 없었다.(후에 리차드 2세(Richard II)가 적법한 후계자로 만들어 주었으나, 헨리 4세가 다시 문제 삼았다.) 

 헨리 7세는 랭커스터(Lancaster) 왕가와 요크(York)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인 장미 전쟁에서 리차드 3세가 사망한 후 유일하게 남은 랭커스터의 남성 상속자(어머니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로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York)와 결혼하며, 장미전쟁을 끝내고 왕위에 올라 튜더 왕가를 시작했다. 영국 왕위에 대한 정통성에 약점이 있던 헨리 7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적자로 더 정통성을 갖추고 있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아들을 결혼 시켜서 왕위를 더 공고히 하려 했다. 아더 튜더가 2살 때부터 이 결혼을 계획했다고 한다. 

캐서린은16살에 15살 였던 아더 튜더(Arthur Tudor)와 결혼했지만, 20주 만에 사별했다. 위에 말한 이유 외에도 스페인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또 캐서린의 지참금 문제도 있었다.) 헨리 7세는 캐서린과  헨리 8세와 약혼시켰으나 헨리 8세가 너무 어려 같이 살 수 없었다. (캐서린이 아더와 첫날밤을 치루지 않았다고 했기에 교황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사벨 여왕이 죽고 카스티야에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자 페르디난도 2세는 캐서린이 돌아오는 것이 불편해서 영국에 머물게 했지만, 헨리 7세와 페르디난도의 사이가 악화되며, 캐서린은 곤란에 빠진다. 더욱이 14살이 되어 결혼할 수 있게 된 헨리 8세가 결혼을 거부하자, 페르디난도 2세는 캐서더린을 영국 대사로 임명하여 영국에 계속 머물게 만들었는데, 친정에서도 시댁에서도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해 무척이나 고생하며 지냈다.

헨리 7세가 죽자 8세는 갑자기 캐서린과의 결혼을 추진한다. 사실 낭만적이었던 헨리 8세는 헨리 7세에게 구박받으며 힘들게 살고 있는 캐서린을 구출해야하는 공주로 여겨 사랑에 빠졌단다. 게다가 그녀는 붉은 빛이 도는 금발에 피부가 흰 미인 인데다가, 정숙하고, 신실하며, 교양있고 온순한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성격이었기에 결혼 후 아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결혼 후 헨리가 스페인과 연합하여 프랑스를 침략하여 영국을 비운 여섯 달 동안(1513년) 캐서린이 섭정을 했는데,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군대를 일으켜 갑옷을 입고 직접 출정해서, 지휘하여 성공적으로 격퇴할  정도로 강단도 있는 여성이었다.(정적이었던 토마스 크롬웰은 그녀가 남성이었다면,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라 칭찬 했단다.) 자선도 많이 베풀어 국민들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는 왕비였다.

헨리와의 사이에 3남3녀가 있었는데, 2남 2녀는 유산, 또는 사산했다.(성별을 알 수 없는 유산한 아이가 하나 더 있다는 말도 있다.) 첫 딸을 사산하고, 첫 아들이자 둘째인 헨리는 태어난 지 52일 만에 죽었고, 연달아 아들 둘을 사산하자 헨리와 캐서린의 사이는 서먹해졌다고. 그래도 항상 캐서린을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다섯 째인 메리(Mary)를 낳은 후 관계가 좀 회복되었으나 또 딸을 사산하게 된다. 캐서린이 나이가 들어 월경이 끊겨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자 아들에 집착하던 헨리와 급격하게 사이가 나빠졌다.

헨리 7세는 정통성 없이 전쟁으로 왕위에 올랐고 튜더 왕조의 첫 번째 왕이었다. 유럽에서 왕은 다른 나라의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관습도 있었기에, 영국 왕실의 정통성도 지니고 있으며, 막강한한 카스티야의 여왕과 아라곤 국왕의 막내 딸인 아라곤의 캐서린 공주는 헨리 8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배우자였다. 거기다 성숙하고 조신하며 순종적이기까지한 캐서린이 낳은 아이가 모두 건강하게 자라났다면, 헨리 8세가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그리 막장으로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이후 아내가 된 불행한 여인들도 없었을 것이다.

임신과 사산을 반복하며 헨리8세의 여성편력도 심해졌는데, 첫 결혼 생활 중(1509-1533) 1519년(캐서린이 마지막 딸을 사산한 해다,) 엘리자베스 블런트(Elizabeth(Bessie) Blount)란 여인에게서 헨리 피츠로이(Henry FitzRoy)라는 아들을 얻어 1925년 공작 작위를 내리며 애정을 보였다. 사생아가 아닌 적자로 인정하려는 절차로 여겨지지만, 그는 1536년 1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기에 적법한 승계자가 되지는 못했다.

헨리는 1526년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에게 관심 갖게 되고, 앤과 결혼하기 위해 1527년 캐서린에게 혼인을 무효로 해 줄 것을 요구했다. 헨리는 형수와 결혼한 것 때문이 마음 저변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계속 아들을 사산하자, 레위기(20장21절)를 근거로 혼인 무효를 교황에게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고, 이 때문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Katherine of Aragon Denounced Before King Henry VIII and His Council
헨리 8세와 공의회 앞에 고발된 아라곤의 캐서린
Laslett John Pot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캐서린은 1531년 궁정에서 추방 당했다. 캐서린은 조카인 카를 5세에게 헨리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계획적으로 괴롭힌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결혼 무효 소송에서 그녀의 편에 선 사람들에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 같은 가톨릭계 인물 외에도 헨리 8세의 누이인 프랑스 왕비 메리 튜더(Mary Tudor)와 개신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도 있었다.

혼인 무효를 받아들이고 앤 불린을 왕비로 인정하면 메리와 함께 풍족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헨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영국의 국왕의 왕비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혼인 무효가 되면 메리가 사생아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더 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궁전에서 쫓겨나고, 메리와도 만나지 못하며 궁핍하게 살다가 말년에는 수도원에 의탁하였고, 1536년 병으로(아마도 암으로 추정)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헨리와 메리를 그리워 했다고 한다. 그녀는 형 아더(Prince of Walse)의 미망인(Dowager Princess of Wales)의 예우로 장례식이 치뤄졌다. 헨리 8세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메리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마음만 먹었으면, 친정인 스페인과 조카가 황제인 신성로마제국을 등에 업고, 헨리와 전쟁을 일으켜 몰락 시킬 수 있는 힘도 있었지만, 영국이 내전에 휩쓸리기를 원하지 않았단다.


출처 : Wikipedia




피의 여왕 메리(Blood Mary, Mary I)는 억울하다.
메리 1세는 수장령을 폐지하고 가톨릭으로 돌아가려는 과정에서 종교적 이유로 개신교도를  최소 287명, 약 300명 정도 처형하여,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인 헨리 8세는 37년의 치세 동안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역, 이단 등으로 몰아 57000명, 많게는 72000명의 사람들을 처형했다.
에드워드 6세 시절에도 상당수(5000명이라는 말도 있다)의 가톨릭 교도를 처형했다(에드워드 6세는 15세에 죽었으니 물론 옆에서 부추긴 인물들의 잘못이겠지만),
엘리자베스 1세 역시 종교적 이유에서 였다.  북부의 봉기(Rising of the North)에서만 적어도 750명이 넘는 카톨릭 교도를 처형했다.(후에 사람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사제가 발각되면 역시 처형하였단다.)  교수척장분지형으로 처형한 유력 인사만 따져도 73명. 
결론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개신교 신자인 에드워드 6세는 가톨릭 신자인 메리의 왕위 계승을 막기 위해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개신교 신자인 5촌 조카인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계승하려 하었다.(물론 옆에서 권력을 탐하던 인물들이 옆에서 부추긴 것도 있지만) 그러나 왕위 계승법에 따라 메리 1세가 적법하게 여왕에 올랐다.  영국에서는 개신교(성공회는 개신교에 포함된다)가 승자이다. 가톨릭과 단절하기 위해 가톨릭 옹호자인 메리 1세는 피의 메리가 되었고, 개신교 옹호자인 엘리자베스 1세는 성녀가 되었다.  헨리 8세도 그저 여성편력 심한 변덕스럽고 난폭한 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