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볼린(Anne Boleyn)
Anne Boleyn English school,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사망 : 1536. 05. 19
혼인기간 : 1533. 05. 28 – 1536. 05. 17
토마스 불린(Thomas Boleyn, Earl of Wiltshire)과 엘리자베스 하워드(Elizabeth Howard) 의 딸로 태어났다. 토마스 불린은 앤이 헨리 8세의 총애를 입으면서 월트셔 백작(Earl of Wiltshire)의 작위를 얻었다. 출생 시기가 정확하지 않는데, 당시 자료를 종합해 보면 1507년이 더 유력한 모양이다.
앤의 아버지 토마스 불린은 외교관으로 일했는데, 네덜란드를 다스리던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의 신뢰를 얻었고, 그녀는 앤을 아주 예뻐해서 아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513년 부터 자신의 집에서 여러가지 궁중예법을 가르쳤다.
1514년 헨리 8세의 누이인 메리가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하게 되자 앤은 메리 왕비의 시녀가 되었고, 이후 루이 12세의 딸이자 메리의 의붓딸인 프랑스의 클로드의 시녀로 7년간 프랑스의 궁에 머물렀다. 여기서 프랑스어를 완벽히 익혔고, 예술 패션, 문학, 음악 종교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여러가지 지식을 익혔다. 춤도 아주 잘 추었으며, 그 당시 보기 힘든 새로운 모습의 여성이었다.
1521년 아일랜드 계 친척인 제임스 버틀러(James Butler)과 결혼하기 위해 귀국했다. 이 결혼은 남자 상속자 없이 죽은 7대 오몬드 백작(Earl of Ormond)이 딸들(딸 중 하나가 마가렛 불린으로 앤의 할머니이다)에게 작위와 영지를 남겼는데, 3대 오몬드 백작의 후손인 피어스 버틀러 경(Sir Piers Butler)이 자신이 정당한 상속자라 주장함으로서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상속 싸움 때문에 아일랜드와 전쟁까지 일어날 까봐 걱정한 헨리 8세가 중재에 나서기까지 했으나, 결혼은 깨져 버렸다. (토마스 불린이 오몬드 백작 작위를 욕심 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이후, 1522년 캐서린의 시녀로 궁에 들게 되었다. 비밀리에 헨리 퍼시(Henry Percy와 약혼 했지만, 슈루즈베리(Shrewsbury) 백작의 딸 메리 탈봇(Mary Talbot)과 아들을 결혼 시키려던 퍼시의 아버지인 헨리 퍼시(Henry Percy, 아들과 이름이 같다.) 노섬벌랜드 백작(Earl of Northumberland)이 기사의 딸인 앤의 신분이 낮다며 반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는 앤에게 관심 있던 헨리가 약혼 사실을 이를 알고 결혼을 깨버렸다는 말도 있는데, 많은 영화에서 이 뒷이야기를 차용했다.)
궁정에서 앤은 우아하고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 부르며 악기도 잘 연주 했다고 한다, 지적이고 통찰력도 우수하여 대화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야심도 있는 활력이 넘치는 여성이었기에 어떤 사교 모임에서든 주목을 받았다.
1526년 부터 헨리 8세는 앤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고, 그녀를 정부로 삼으려고 했다. 그 때 이미 그는 앤의 누이인 메리 불린(Mary Boleyn)을 정부로 삼은 적이 있었다. (메리는 1520년 윌리엄 캐리(Willian Carey)와 결혼 했다. 그들의 자식 중 1524년에 태어난 캐서린 캐리(Catherine Carey)와 1526년에 태어난 헨리 캐리(Henry Carey)가 헨리 8세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헨리 8세는 인정하지 않았다. (헨리 8세의 자식은 일찍 죽거나 후손을 얻지 못했는데, 저 둘은 각각 16남매, 13남매를 낳았으니 소문이 맞지 않을 확률이 더 커 보인다. 그냥 왕과 왕비의 이름을 따라 이름 지은 듯 하다.)
밀고 당기는데 선수였던 앤은 정부가 되기를 거부했고, 몸이 달은 헨리 8세는 그 때부터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거부하자,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를 세웠다. 헨리는 교황청과 관계를 끊었어도, 속은 여전히 카톨릭 신자와 다름 없었지만, 앤 볼린은 개신교 신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후 개신교의 교세를 늘이는데 여러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휘둘렀다. 앤과 결혼 생활 중 헨리 8세는 많은 카톨릭 교도들을 처형했다.
1531년 헨리는 캐서린을 궁에서 쫓아내고 앤에게 왕비의 방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는데, 백성들은 여전히 캐서린을 지지하고 동정하였기에 앤 불린은 미움을 받았다.
앤과 헨리는 1533년 1월 25일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5일 후 캔터베리(Canterbury) 주교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 무효화를 선언함으로서, 앤과 헨리의 결혼은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왕비로서 대관식을 치루고, 9월 7일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다. 헨리 8세는 딸이어서 실망했지만, 건강한 아이를 얻었으니 아들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엘리자베스를 아꼈다. 그러나 1번의 상상 임신, 2번의 유산을 겪으며 헨리 8세의 사랑을 잃게 되었다.
앤의 활동적이며 당돌한 성격은 결혼 전에는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결혼 후에는 질투가 심하고 너그럽지 않으며,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이혼하는 부부들을 보면 흔히 결혼한 이유가 이혼하는 이유가 된단다.) 헨리와 마찬가지로 사치스러워서, 헨리의 폭정에 대한 비난이 앤에게도 쏟아졌다. 결정적으로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대중은 완전히 그녀에게 등을 돌린다.
앤과 헨리는 캐서린과 메리에게도 매우 못되게 굴었는데, 캐서린이 죽자 그 다음날 영국에서 기쁨과 축하의 상징인 노란 옷을 입고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앤은 메리와는 화해를 하려 했지만, 메리가 거부했고(당연하지, 내 엄마를 쫓아낸 아빠와 바람난 여자를 누가 받아들이나), 화가 난 헨리와 앤은 메리가 더 이상 공주가 아님을 자각하도록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삼았다고 한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어떤 미래를 맞을지 잘 알았기에, 유산을 반복하며 초조해진 앤은 더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변했는데, 그 사이 헨리는 앤의 시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에게 눈길을 주게 된다. 앤이 제인 시모어를 질투하자(캐서린은 헨리의 여자 문제에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남아있던 정마저 떨어진 헨리는 앤이 자신을 유혹하려 속임수나 마법 사용해서 결혼하게 되었다고까지 말하며 이혼을 준비한다.
앤이 몰락한 이유를 크롬웰이 그녀를 정치적인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모략을 세워 제거했다는 말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헨리 8세의 변덕으로 본다. 설에 따르면, 아들을 임신하지 못해 절박해진 앤이 오라비인 조지 불린(George Boleyn)을 침실로 불러들였는데, 차마 관계는 맺지 못했고, 조지 불린은 방을 떠났지만, 남편과 사이가 아주 나빴던 그의 아내 제인 파커가 헨리 8세에게 일렀다고 한다. 왕의 총애 말고는 믿을 것이 없었던 앤은 가족에게서도 지지 받지 못했다.
어쨌든, 헨리 8세는 앤을 조지 불린과의 근친상간, 그 외 5 명의 남자들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1536년 5월 19일 처형했다. (아라곤의 캐서린이 병으로 사망한 지 불과 다섯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왕비의 간통은 왕의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들을 왕 위에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반역이었다. 화형으로 죽이려다가 왕비였었던 것을 감안해서 참수형으로 끝냈다고 한다. 앤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제인 시모어(Jane Seymour)
Jane Seymour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사망 : 1537. 10. 24
혼인기간 : 1536. 05. 30 – 1537. 10. 24
존 시모어경(Sir John Seymour)과 매저리 웬트워스(Margery Wentworth)에 태어났으며, 출생시기는 정확하지 않은데, 1504년에서 1509년 사이로, 일반적으로 1508년으로 추정한다.
캐서린이나 앤처럼 수준 높은 교육은 받지 못했고, 기본 교육만 받아 글을 쓰고 읽을 줄은 알았지만,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녔다거나, 정치적 수완이 있다거나 하지 않았다. 수예나 가정을 돌보는 일에 능숙했다고 한다. 가족들도 궁정에 들여 보내기 보다는 그냥 평범한 사람과 결혼 시킬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설에 의하면, 아버지 존 시모어가 며느리와 불륜을 행하는 추문을 일으켜서 혼삿길이 막혀버렸다는 말이 있다.
그 때문 인지는 모르지만, 뒤늦게 궁정으로 들어가 1527년 경부터 캐서린 왕비(이 때는 이미 헨리가 캐서린을 거들떠 보지도 않을 때라 야심을 갖고 가족이 시녀로 들여 보냈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의 시녀가 되어 그녀를 섬기다가, 앤이 왕비가 된 다음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외모는 아주 미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며, 체구도 아담하였다.성격은 예의 바르고 온화하며, 정숙하고 유순하였다. 다툼이 있으면 중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성격상 캐서린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냥 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앤 앞에서 헨리가 선물한 목걸이를 하고, 그것을 만지작 거리며 질투심을 자극하기도 했단다. 또 헨리가 잠자리를 요구 하자 '자신의 명예는 천 명의 목숨으로도 손상시킬 수 없으며,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하며 완곡히 거절했고, 헨리는 그 정숙함에 반해 더 좋아하게 되어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되었다 한다. (어떤 이들은 제인이 캐서린 왕비를 매우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었고, 앤이 캐서린에게 못되게 구는 것을 다 봐왔기 때문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마음 속에서 앤을 왕비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앤이 한 짓을 그대로 그녀에게 되돌려 준 것 이라고도 말한다.)
앤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헨리는 앤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에게 관심을 보인다. 이를 눈치 챈 제인 시모어의 아버지와 오라비들은 그녀를 왕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애썼다는 말도 있다.
헨리와 제인 시모어는 앤이 처형 당한 당일 약혼하고, 10 일후 결혼하였다.
온화한 성품이지만, 여왕으로 서는 엄격하고 단호해서, 앤이 사치스럽게 꾸민 궁정도, 소박하게 바꾸고 호화로운 파티 등도 삼가하였다. 정치에는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다만, 보수적이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제인은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 참여자에 대한 사면을 헨리에게 부탁했었는데, 헨리에게 앤의 전례를 들며 협박당했다.).
캐서린 왕비를 존경하고 동정했으며, 메리도 안타깝게 여겨, 공주로서의 신분을 회복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적어도 헨리와 메리의 관계를 조금 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메리는 자신을 위해 노력해주는 제인에게 감사했고, 또 제인이 가톨릭 신자이기도 해서 더 호의적이었다.
제인 시모어가 "복종하고 섬기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고, 온화하고 유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헨리가 캐서린과 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가까이에서 다 보았고, 가톨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사면을 호소한다거나, 미워하고 있던 딸 메리를 변호하고 화해시키려 하는 등의 행동을 보면 나름 줏대와 용기가 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결혼 한 다음 해인 1537년 임신을 하고 10월 12일 2박 3일의 산고 끝에 에드워드 6세를 출한하였다. 15일에 행해진 에드워드 6세의 세례식에도 모습을 보여 잘 회복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출산 12일 만인 24일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헨리의 왕비 중 유일하게 왕비로서 장례식을 치른 여인이다.
앤이 처형당한 당일 제인과 약혼 했던 헨리는 제인이 죽은 후 세 달 동안 검은 옷만 입고 지냈으며, 2년도 더 지난 후 클레베의 앤(Anne of Cleves)와 혼인하였다.
헨리는 제인을 모든 아내 중 가장 사랑했다 말했고(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단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헨리에게 소중했던 것이지 가장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단다.), 죽은 뒤 제인 옆에 묻혔다.
대중 매체에서 앤 불린을 예쁜 여배우가 맡아, 매력적인 여인에 헨리 8세의 피해자로만 보여주고, 아라곤의 캐서린과 메리 1세에게 못되게 군 것은 생략해 버리니,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외국 댓글을 보면 제인 시모어가 앤 불린을 죽이고 왕비가 되었다고 악녀라하는 사람도 있던데, 왕비를 폐위하는 전례를 만들게 부추긴 것이 앤 불린이다. 왕비 자리 욕심 내지 않고, 자식을 왕 만들 욕심 내지 않고, 처음 헨리 8세가 원한대로 정부로 지냈으면 총애 받으며 잘 지내다가, 나중에 왕이 싫증 내면 다른 남자 만나 결혼해서 잘 살았을 것이다.(다른 정부들도 다 그랬으니.) 아들을 낳았으면, 헨리 피츠로이 처럼 공작 작위를 내렸다가, 적법한 후계자로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야망을 목숨과 바꾸었다. 제인 시모어는 앤과 같은 방법으로 왕비가 되었을 뿐이다.
규칙을 처음에 깨기는 어렵지만, 한 번 깨고 나면, 그 다음 다시 깨기는 쉬운 법이다. 앤이 뒷배경이 없어서 죽었지. 혼인 무효에 동의해주지 않고 7년을 버틴 캐서린을, 헨리와 앤이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캐서린 뒤에 있는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교황청과 그 영향 하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무서워서 못 죽였겠지. 또 순종적인 아라곤의 캐서린도 혼인 무효 요구에 그렇게 강하게 저항했는데, 성격 강한 앤 불린은 어떻게 할 지 누가 봐도 알 수 있느니 죽여버렸을 것이다.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촌인데, 제인 시모어도 그 둘과 증조할머니가 같다(역시 관련 없는 친척은 뺐다). 증조 할머니가 첫 남편인 틸니(Tilney)와 일찍 사별하고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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