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페의 앤 (Anne of Cleves)
Anne of Cleves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혼인기간 : 1540. 01. 06 – 1540. 07. 12
가톨릭 교회의 압박에 저항하기 위한 정치적 동맹의 필요성을 느꼈던 헨리는, 제인 시모어가 사망한 뒤 2 년 후 1539년 3월 부터 서부 독일의 루터교 수장인 윌리엄(William, Duke of Jülich-Cleves-Berg)과 동맹을 맺기 위해 그의 여동생인 앤과 정략 결혼 협상을 시작했다. 그런데 가족 간의 종교가 달라서 그녀의 어머니는 엄격한 카톨릭 신자였고, 앤도 가톨릭 신자였지만 결혼하며 개종하였다.(혼인 무효 후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종교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인듯.)
사실 이전 부터 재혼하려 했지만 헨리가 주제 파악 못하고 미인만 고집했고, 그의 아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소문이 났기에 빨리 이루어지지 못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Christina of Denmark)도 헨리 8세의 뫙비 후보자 목록에 올랐었다. 그러나 헨리가 아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이미 유럽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지라, '내가 머리가 두 개 있다면, 하나는 영국 국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라 말하며 거절했다.
이 때는 아들도 얻은 후 인지라, 성적 매력보다는 정략적 결혼을 추진하려 했는데, 여러 초상화들 중 앤이 마음에 든 헨리는 결혼을 결정했으나, 영국에 도착한 앤을 보고 실망한 헨리는 그녀가 말같이 생겼다며 불평을 했다.
일설에 따르면 헨리8세가 클레페의 앤을 처음 부터 싫어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공식적인 만남이 있기 전, 헨리 8세는 아직도 젊었을 때처럼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몰래 변장을 하고 앤 앞에 나타나 추파를 던졌는데, 누구인지 모르는 앤이 당황하여, 뚱뚱한 중년 남자의 접근을 거절하자, 혼자 망신 당했다고 생각해서, 공식적으로 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녀에게 못생기고 냄새가 난다며 모욕했다는 말이 있다.
클레페의 앤은 제인 시모어와 마찬가지로 궁정 교육은 잘 받지 못했고(영어에도 서툴었다고), 수예에 뛰어났다. 성품도 온화하고 도덕적이며 온순하고, 아주 순진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묘사한 기록에 의하면, 키도 크고 날씬하며 금발에 사랑스런 얼굴을 하고 있다고 되어있다.
헨리는 앤과 결혼하기 싫었지만, 정치적 정략 결혼이었기 때문에 마지 못해 받아들였다. 결혼을 했어도 부부관계는 하지 않았다. 헨리는 크롬웰에게 앤을 예전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단다. 헨리는 밤에 자기 전에 손을 잡고 앤에게 키스하며 잘 자라 말하고, 아침이 되면 또 잘 잤냐고 키스하며 인사를 했을 뿐이었단다(앤에게서 성적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헨리는 앤의 시녀 였던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에게 반해, 앤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일방적으로 앤에게 이혼을 통보하며, 궁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헨리와 앤이 부부관계를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을 적법하게 무효화할 수 있었다.(같은 이유로 아라곤의 캐서린이 아더 튜더와 결혼 했었지만, 헨리 8세와 다시 적법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
자식도 없었던 앤은 혼인 무효에 동의했고, 이 결혼을 추진했던 크롬웰은 이 일이 반대파에게 빌미가 되어 표적이 되어 반역으로 처형당했다. 후에 헨리는 클롬웰의 처형을 후회했단다. (클레페의 앤이 혼인 무효에 동의해 주지 않았어도 그녀의 오빠인 윌리엄이 정치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헨리는 그녀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교황청과 대립하는 와중에 개신교 국가하고도 척을 지게 될 테니.)
앤은 영국에 영지(앤 불린 가문이 소유했던 히버 성(Hever Castle)을 포함하여)를 받고, 이전 왕비로서 재정적 지원도 충분히 받았으며, 헨리는 순순히 혼인무효에 동의 해준 앤을 자신의 '사랑하는 누이'라고 부르며 아꼈단다.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된 다음 윌리엄 율리히-클레페 공작은 헨리에게 재결합할 것을 요구했지만, 헨리에게 거절 당했단다.(헨리 8세가 어떤 인물인 줄 알면서 다시 결혼하라고 하다니, 오빠가 못됐다.)
앤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살았다. 사망 원인은 암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헨리 8세와 끝까지 사이도 좋았고, 평생 큰 걱정거리 없이 살았던 사람이다.
캐서린 하워드 (Catherine Howard)
Catherine Howard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그림 제대로 찾은 것 맞지? 왜 이렇게 나이들어 보이냐?) |
혼인기간 : 1540. 07. 28 – 1541. 11. 23
에드먼드 하워드(Edmund Howard)와 조이스 컬페퍼(Joyce Culpeper)의 딸이며 앤 불린의 사촌이다.
아버지가 2대 노퍽 공작(Duke of Norfolk) 토마스 하워드의 아들이었지만, 맏아들이 모든 영지를 물려 받아 그다지 부유하지 자라나지 못했다. 궁에 들어가서는 첫째인 3대 노퍽 공작 토마스와 둘째인 에드워드는 왕의 신임을 얻으며 지냈지만, 에드먼드 하워드는 공작의 아들이라 자존심만 세고, 사치스럽고, 입도 험한데다가 행동도 불량해,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다.
재산 때문인지 미망인 이며, 자식도 여럿 있던 조이스 컬페퍼와 결혼 했으나, 제 버릇 못 버린다고, 도박 중독에 까지 걸려, 처자식 놔두고 잠적하곤 했다. 에드먼드 하워드는 앤 볼린이 왕비에 오르며 그 덕으로 관직에 올랐지만, 불성실한 근무 태도에 병까지 얻어 해임되었다 한다.
캐서린 하워드는 어머니는 1528년에 죽고 아버지는 두 번 재혼하며, 나 몰라라 했기 때문에, 부모의 돌봄을 거의 받지 못했고, 이모 할머니이자 의붓 할머니인 아그네스 하워드(Agnes Howard, Dowager Duchess of Norfolk)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는 공작 부인이 후견인으로 있는 귀족이지만 가난한 친척들의 자녀들이 많이 있었는데, 부인은 대부분의 생활을 궁정에서 보냈고, 피후견들의 양육이나 교육에 직접적으로 관하여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캐서린 하워드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거의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고, 순진했지만, 발랄 하고 아주 자유 분방하였다. 그곳에서 헨리 매녹스(Henry Mannox)란 음악교사를 만나 사귀었지만, 진짜 연인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매녹스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초반, 캐서린은 10대 초반 이었다 하니,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고, 나이 많은 남자의 순진한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성추행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매녹스와 헤어진 다음 캐서린은 공작 부인의 비서인 프란시스 더햄(Francis Dereham)과 사귀었는데, 진짜 연인으로 발전하여, 서로 남편과 아내로 부르기 까지 하였고, 더햄이 부재 중일 때는, 캐서린에게 재정 관리 까지 맡기는 등 거의 정말 아내로 대접했다고 한다. 그들은 결혼하기로 사전 계약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1539년 공작 부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둘의 관계는 끝나고 더햄은 아일랜드로 추방되었다.
이후 캐서린은 삼촌인 토마스 하워드가 앤 클레페의 시종으로 궁에 들여 보냈다. 꽃다운 나이 16 살의 캐서린은 궁에 들어가자 마자 곧 헨리 8세의 눈에 들게 되었고, 그곳에서 먼 친척인 토마스 컬페퍼(Thomas Culpeper)를 만났다.
클레페의 앤과 결혼했지만 헨리 8세는 앤에게는 관심이 없고 점점 캐서린 하워드에게 관심을 가졌다. 헨리는 캐서린 같은 여성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애정을 보였다. 선물 공세를 펴며 그녀를 ‘가시 없는 장미’, ‘여인 중 아주 귀한 보석’이라 칭찬했다. 삼촌인 토마스 하워드는 권력을 가질 욕심에 헨리의 아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면서도, 캐서린 하워드를 왕비로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클레페의 앤과의 결혼이 무효가 된지 19일 만에 결혼 했는데, 이 때 헨리8세는 49세, 캐서린 하워드는 17(아마도) 였다. (메리 1세가 1516년 생이다.)
캐서린은 왕과 결혼하기 전 이미 잘생긴 청년인 토마스 컬페퍼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헨리 8세가 아픈 다리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그녀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이 더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그 둘의 사이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토마스 컬페퍼가 무서운 헨리 8세의 존재에도 캐서린의 애정에 응답한 이유는 아마도, 건강이 나쁜 헨리 8세가 죽은 후 권력을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그리고 그 둘을 부추긴 것은 앤 불린이 조지 불린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헨리에게 말한 조지 불린의 아내 제인 파커였다(미친년이네.).
캐서린의 결혼 전 행실이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귀에 들어가고 왕에게도 알려진다. 헨리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결국 조사를 지시한다. 크랜머 주교는 캐서린과 더햄이 사전 계약을 하고 거의 부부같이 지낸 것이 밝혀지면, 결혼 전 관계는 간통이 아니고,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무효가 되므로, 그 둘은 추방되고 헨리 8세만 망신 당하는 선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했단다.(설마 그럴 리가. 주교는 공포에 사리 분별 못하는 10대의 어린 왕비를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조사 과정에서 더햄은 캐서린과의 과거 관계를 인정했으나, 왕과 결혼 후에는 어떤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했으나, 캐서린은 과거 관계를 끝까지 부정하였다. 그러던 중 캐서린이 컬페퍼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발견되며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달았다. 컬페퍼는 캐서린과 성관계를 가질 의향은 있었으나, 실제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고 했고, 캐서린도 불륜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연애편지의 내용이 너무나 애틋하여, 왕이 믿게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컬페퍼와 더햄은 반역죄로 각각 참수형, 교수척장분지형으로 처형당하고, 캐서린도 1542년 2월 10일 참수 당했다. 캐서린이 죽으면서 ‘여왕으로 죽지만, 컬페퍼의 아내로 죽고 싶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사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왕을 배반한 것에 대해 ‘천 번 죽어 마땅하다’며 용서를 빌었으며, 또 가족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 줄 것과,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단다. 이번엔 제인 파커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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