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파 (Catherine Parr)
Catherin Parr After Master Joh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사망 : 1548. 09. 05
혼인 기간 : 1543. 07. 12 – 1547. 01. 28
아버지는 헨리 8세에게 신임받는 관리였고, 어머니는 캐서린 왕비의 시녀였으며, 캐서린 왕비는 그녀의 대모였다. 캐서린 이란 이름은 아라곤의 캐서린 이름을 딴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가톨릭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어느 시점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일반 귀족 여성과 비슷하게 교육 받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서 계속 공부했다고 한다. 프랑스어, 라틴어, 이탈리어에 능통했고, 왕비가 되어서는 스페인어까지 공부했다.
헨리와 결혼 전 이미 두 번(에드워드 버그 경(Sir Edward Burgh), 3대 라트머 남작 존 네빌(John Nevill, 3rd Baron Latimer))이나 결혼한 경력이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지만, 나이 많은 남편과 결혼해 돌봐야 했지만, 살뜰히 챙겼고(두 번째 남편의 이름이 새겨진 성경을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고 한다.), 사별한 관계로 상당한 유산을 물려 받았다.
두 번째 남편이 죽은 후 영지인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은총의 순례 때 북쪽에서 고생했던 캐서린 파는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어머니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의 인맥을 이용하여 공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메리의 집에 시녀로 들어가 친분을 쌓았다. 거기서 헨리 8세의 관심을 받게 된다. 늙고 병든 헨리는 자식을 얻을 생각이었기 보다는 두 번의 결혼으로 나이 많은 남편을 돌 본 경험이 있고, 의붓 자식들에게도 살뜰 했던 성품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듯 하다.
캐서더린은 제인 시모어의 오라비인 토마스 시모어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헨리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왕비에 올랐다.
헨리의 세 자녀와 모두 잘 지냈으며,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를 교육시키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 복권시키는 3차 계승법령(1543년)을 통과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다.
개신교 신자였고 그와 관련하여 책도 출간하였다. 영국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 최초의 여성이란다. 상당히 급진적 성향의 개신교들 후원하였기에, 반-개신교 정서를 불러 일으켜서, 헨리 8세를 분노하게 만들었고(헨리는 무늬만 개신교이지 속은 가톨릭이다.), 체포 명령까지 내렸으나, 바로 고개를 수그리고 헨리에게 복종함으로써 화를 면했다.
1544년 헨리가 프랑스로 출정을 나갔을 때는 섭정을 성공적을 수행하기도 할 정도로 정치적 역량도 뛰어났다. 왕이 죽은 후 유언에 따라 정치에는 관여하지 못했지만, 왕태후(queen dowager)로써 제대로 대접 받도록 허락 받았으며, 엘리자베스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6 달 후 제인 시모어의 오라비인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했는데,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헨리가 죽은 후 너무 빨리 하는 바람에, 메리와 에드워드는 매우 불쾌해 했다고 한다. 35살에 4번의 결혼 중 처음으로 임신을 하게 된다. 이 기간 토마스 시모어는 엘리자베스에게 흑심을 보였는데(잠옷 입고 엘리자베스에게 가서 간지럼을 태운다거나, 엉덩이를 때린다거나 하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상황이 극한에 치닫기 전까지는 캐서린도 그냥 묵인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엘리자베스를 안토니 데니 경(Sir Anthony Denny)의 집으로 보냈다.(토마스 시모어가 인물이 좋았다는데, 그 때문인지 엘리자베스도 연애 감정까지 갔는지 모르지만, 호감을 가졌었다고 한다.( 토마스 시모어 나쁜 놈. 엘리자베스는 겨우 14살 이었다.) 메리는 선견지명이 있었는지(새엄마의 이른 재혼으로 화가 나서라지만), 캐서린이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하자 엘리자베스에게 당장 그 집에서 나오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캐서린 파는 토마스를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토마스는 그리 사랑하지 않았고, 야심만 컸던 모양이다. 캐서린과 결혼 하기 전 이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했었지만 뜻 이루지 못했고, 캐서린이 죽은 후 또 엘리자베스랑 결혼 하려고 했으나, 데니 경에게 보내지기 전의 사건으로 캐서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거절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6세의 섭정 자리를 얻으려고 무리하다가 결국 반역으로 처형당했다.
1548년 캐서린은 첫 딸이자 외동딸인 메리 시모어(Mary Seymour; 의붓 딸인 메리의 이름을 땄다)를 낳고 산욕열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그렇다면 헨리 8세는 어떤 아내를 제일 사랑했을까
헨리는 공식적으로 제인 시모어를 제일 사랑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제인 시모어가 심기를 거슬렀을 때, 앤 불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거할 수 있다고 협박한 것을 보면, 그렇게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 협박은 앤 불린이 결백한데도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래 살아서 헨리의 심기를 거스릴 일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 지 모른다.(하지만, 제인 시모어는 순종적인 여인이었고, 아들이 있으니 죽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결국 그렇게 원하던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그 난리를 피웠기에, 그녀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결혼 3 년 만에 죽여? 처음에 사랑에 빠졌을 지는 모르나, 내 눈에는 그 근원이 소유욕으로 보인다. 앤을 갖지 못해서 집착했던 것이고, 가지고 난 다음에는 아들 후계자를 낳는 목적을 이루어 주지 못하니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렇게 찬사를 보냈던 캐서린 하워드의 경우는, 49세 아저씨가 17(또는 16)살 소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라...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랑했다면, 단지 결혼할 때 처녀가 아니었다고 죽이지 않는다. 설령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추방할지언정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젊은 여인에 대한 잠시의 미혹이었다 본다.
클레페의 앤은 성적 이끌림은 전혀 없었지만, 호감은 있었던 사이. 헨리도 인정한 사랑하지 않은 사람.
캐서린 파와 결혼했을 당시 이미 헨리는 부부관계를 할 수 없을 건강 상태였다고 학자들은 본다. 아마도 사랑이나 성적 이끌림 보다는, 나이 많은 남편들과 살았던 캐서린 파에게서 안정감을 찾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현명하며, 성숙하고 너그러운 성품이고, 전 남편들의 의붓 자식들에게도 잘 했으니, 자기 자식, 특히 에드워드 6세를 잘 키워 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고, 도전 받는다 싶으면 가차 없었다. 캐서린이 현명해서 죽음을 벗어났지, 앞의 부인 같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결혼할 당시 아라곤의 캐서린은 24살, 헨리 8세는 18살 이었다. 헨리 7세가 죽기 전, 결혼할 수 있는 나이인 14살이 되었을 때, 이미 결혼을 거부 했었으니, 결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결혼했다. 바람을 피우기는 했지만, 월경이 끊기기 전에는 꾸준히 아라곤의 캐서린을 찾았다고 한다. 기록에는 그 둘의 사이가 유별나게(unusual) 좋았다고 되어 있단다. 결혼 초기 헨리가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아주 깊이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프랑스로 출정 나가면서 섭정을 맡길 정도로 신뢰도 했고, 캐서린은 침략한 스코틀랜드를 격퇴함으로서 그 신뢰에 답해 주었다. 여러 번의 사산을 겪으면서 둘 사이가 서먹해지기도 했지만, 헨리는 겉으로 아들을 낳지 못한 것에 대하여 캐서린을 비난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 블런트와 사생아를 낳은 것도 1519년, 캐서린이 마지막 아이(여섯째 혹은 일곱째)를 사산한(1518년) 이후이다.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망가진 관계이지만, 시작은 아직 세상 풍파 격지 않은 막 성년에 접어드는 순수한 18살 청년의 6살 연상의 여인에 대한 낭만적 사랑이었다 본다.
그래서 내가 본 헨리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는 아라곤의 캐서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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