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Henry VIII)
출생 : 1491. 07. 28
사망 : 1547. 01. 28
재위기간 : 1509. 04. 22 - 1547. 04. 28
여섯 명의 아내를 맞이하는 과정이 파란만장해서 더 유명하다.
헨리 8세 After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형인 아더 (Arther, Prince of Wales)가 15세의 나이로 죽자, 10살의 나이에 그 뒤를 이어 왕세자가 되었다.
젊어서는 아주 잘생기고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아주 낭만적인 사람이어서 시를 쓰는 작가이기도 하고 작곡을 하기도 했단다.(영국 민요인 푸른 옷 소매를 악곡으로 만든 것이 헨리 8세다.) 잘 교육 받았고 언어 능력도 뛰어나 프랑스어, 라틴어, 스페인어에 능통했다. 신앙심도 두터웠으며, 대단히 활동적이어서 사냥도 좋아 하고 테니스도 잘 쳤다고 한다.
여성 편력이 있기는 했지만(사실 여성편력 없는 왕은 거의 없지) 첫 번째 아내와 아주 사이좋게 잘 지냈으나 아내가 나이가 들어 아들을 낳을 수 없게 되자 여성 편력이 매우 심해지고, 건강한 사생아 아들을 낳게 되자, 적법한 아들을 얻는 것에 대한 집착이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
원래 가톨릭 신자였으나 앤 불린(Anne Boleyn) 결혼하려고, 첫 번째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의 결혼을 무효화 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수장령을 선포하며, 영국 국교회를 창설하였다.(교황과 단절되기만 했지 전례와 교리는 카톨릭 교회의 그것과 같았고, 유럽의 개신교와는 달랐다. 제대로 된 종교개혁은 것은 엘리자베스 1세 때였다.)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반에 올라, 수녀원과 수도회를 해산하고 그 영지와 재산을 몰수. 교황에 의해 파문 당했다.
교황의 영향력을 없애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영국 헌법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반대 의견이 나올 때마다, 반역, 이단이란 명목으로 재판도 없이 수 많은 이들을 처형하였다. 토마스 크롬웰처럼 처음에 총애하던 신하들도 눈밖에 나게 되면 가차없이 처형하였다.
종교 개혁으로 수도원에서 몰수한 재산과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금, 이전에 교황청에 지불하던 돈을 모두 왕실 수입으로 전환하여 국고는 풍부해졌으나 개인적인 사치와 주변 국가들, 특히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코틀랜드와의 쓸데없는 전쟁으로 재정은 고갈되었다.
하지만 왕실 해군에 크게 투자하여 5척 이였던 군함을 53척으로 증가시켰고, 웨일즈를 영국으로 합병했으며, 아일랜드의 왕관법에 따라 아일랜드를 왕으로 통치한 최초의 영국 군주였다.
그 시대에는 헨리 8세를 매력적이며 야심있고 업적이 많은 왕으로 생각했다. 영국 왕 중 가장 카리스마 있는 왕 중 하나이며, 그의 치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생활이나 정치적 관계는 잔인하고, 변덕스러웠지만, 국가를 강력하게 만들고, 왕권을 강화하여 조정과 지방의 대소사를 왕이 직접 돌보며, 제대로 된 군주정치를 구현하고, 빈민과 실직자를 구제하여, 귀족들 생활에 별 관심 일반 백성들에게는 평판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고 애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1536년 낙상하여 심한 부상을 당했는데, 이 때 머리를 다쳐 뇌손상이 일어나 성격이 변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있다. 다리도 크게 다쳤는데, 영 회복되지 않았다고 하며, 거의 움직이지를 못해 심하게 뚱뚱해지고, 다리에 궤양이 생겨 고름을 내뿜는 등 건강으로 고통 받았다.
말년에 허리둘레가 140cm에 이르렀다. 1547년 비만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말년에는 호색한에 이기적이고 편집증적이며, 폭압적인 군주로 묘사된다.
아들 에드워드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아내는 모두 영국 국왕 에드워드 1세의 후손이다. 가계도가 워낙 복잡해 배우자들과 상관없는 친척들은 모두 빼버렸다. (헨리 8세가 아들 얻기가 어려웠던 이유가 혹시 근친에 의한 유전적 결함???)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Catalina de Aragón)
Catherine of Aragon by Lucas Horenbou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사망 : 1536. 01. 07
혼인기간 : 1509. 07. 11 - 1533. 05. 23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Isabella I of Castile) 와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 II of Aragon)의 딸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이다. 왕실에서 왕녀로 엄격히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캐서린과 헨리 7세는 고조할아버지(John of Gaunt)는 같지만, 고조할머니는 다르다. 존 곤트는 세번 결혼 했는데 첫 번째 결혼인 영국 왕족 랭커스터의 블랑쉬(Blache of Lancaster)와 결혼하여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헨리 4세가 태어났고 헨리 6세까지 이어진다.
블랑쉬가 죽은 후 곤트는 카스티야의 콘스탄체(Constance of Castile)과 결혼하며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 서열도 얻었다. 아라곤의 캐서린의 고조 할머니이다.
곤트는 콘스탄체와 결혼 한 상태에서 캐서린 스윈포드(Katherine Swynford)와 바람을 펴 자식을 얻었는데, 이들에게 뷰포트(Beaufort)란 백작 작위를 내려 가문을 형성한다. 헨리 7세는 마가렛 뷰포드(Margaret Beauford)와 에드먼드 튜더(Edmond Tudor)의 아들로 튜더 왕조의 첫번째 왕이다. 콘스탄체가 죽은 후 곤트가 캐서린 스윈포드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뷰포드 가문이 왕족이 되기는 했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가질 수 없었다.(후에 리차드 2세(Richard II)가 적법한 후계자로 만들어 주었으나, 헨리 4세가 다시 문제 삼았다.)
헨리 7세는 랭커스터(Lancaster) 왕가와 요크(York)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인 장미 전쟁에서 리차드 3세가 사망한 후 유일하게 남은 랭커스터의 남성 상속자(어머니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로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York)와 결혼하며, 장미전쟁을 끝내고 왕위에 올라 튜더 왕가를 시작했다.
영국 왕위에 대한 정통성에 약점이 있던 헨리 7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적자로 더 정통성을 갖추고 있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아들을 결혼 시켜서 왕위를 더 공고히 하려 했다. 아더 튜더가 2살 때부터 이 결혼을 계획했다고 한다.
캐서린은16살에 15살 였던 아더 튜더(Arthur Tudor)와 결혼했지만, 20주 만에 사별했다. 위에 말한 이유 외에도 스페인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또 캐서린의 지참금 문제도 있었다.) 헨리 7세는 캐서린과 헨리 8세와 약혼시켰으나 헨리 8세가 너무 어려 같이 살 수 없었다. (캐서린이 아더와 첫날밤을 치루지 않았다고 했기에 교황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사벨 여왕이 죽고 카스티야에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자 페르디난도 2세는 캐서린이 돌아오는 것이 불편해서 영국에 머물게 했지만, 헨리 7세와 페르디난도의 사이가 악화되며, 캐서린은 곤란에 빠진다. 더욱이 14살이 되어 결혼할 수 있게 된 헨리 8세가 결혼을 거부하자, 페르디난도 2세는 캐서더린을 영국 대사로 임명하여 영국에 계속 머물게 만들었는데, 친정에서도 시댁에서도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해 무척이나 고생하며 지냈다.
헨리 7세가 죽자 8세는 갑자기 캐서린과의 결혼을 추진한다.
사실 낭만적이었던 헨리 8세는 헨리 7세에게 구박받으며 힘들게 살고 있는 캐서린을 구출해야하는 공주로 여겨 사랑에 빠졌단다. 게다가 그녀는 붉은 빛이 도는 금발에 피부가 흰 미인 인데다가, 정숙하고, 신실하며, 교양있고 온순한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성격이었기에 결혼 후 아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결혼 후 헨리가 스페인과 연합하여 프랑스를 침략하여 영국을 비운 여섯 달 동안(1513년) 캐서린이 섭정을 했는데,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군대를 일으켜 갑옷을 입고 직접 출정해서, 지휘하여 성공적으로 격퇴할 정도로 강단도 있는 여성이었다.(정적이었던 토마스 크롬웰은 그녀가 남성이었다면,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라 칭찬 했단다.) 자선도 많이 베풀어 국민들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는 왕비였다.
헨리와의 사이에 3남3녀가 있었는데, 2남 2녀는 유산, 또는 사산했다.(성별을 알 수 없는 유산한 아이가 하나 더 있다는 말도 있다.) 첫 딸을 사산하고, 첫 아들이자 둘째인 헨리는 태어난 지 52일 만에 죽었고, 연달아 아들 둘을 사산하자 헨리와 캐서린의 사이는 서먹해졌다고. 그래도 항상 캐서린을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다섯 째인 메리(Mary)를 낳은 후 관계가 좀 회복되었으나 또 딸을 사산하게 된다. 캐서린이 나이가 들어 월경이 끊겨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자 아들에 집착하던 헨리와 급격하게 사이가 나빠졌다.
헨리 7세는 정통성 없이 전쟁으로 왕위에 올랐고 튜더 왕조의 첫 번째 왕이었다. 유럽에서 왕은 다른 나라의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관습도 있었기에, 영국 왕실의 정통성도 지니고 있으며, 막강한한 카스티야의 여왕과 아라곤 국왕의 막내 딸인 아라곤의 캐서린 공주는 헨리 8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배우자였다.
거기다 성숙하고 조신하며 순종적이기까지한 캐서린이 낳은 아이가 모두 건강하게 자라났다면, 헨리 8세가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그리 막장으로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이후 아내가 된 불행한 여인들도 없었을 것이다.
임신과 사산을 반복하며 헨리8세의 여성편력도 심해졌는데, 첫 결혼 생활 중(1509-1533) 1519년(캐서린이 마지막 딸을 사산한 해다,) 엘리자베스 블런트(Elizabeth(Bessie) Blount)란 여인에게서 헨리 피츠로이(Henry FitzRoy)라는 아들을 얻어 1925년 공작 작위를 내리며 애정을 보였다. 사생아가 아닌 적자로 인정하려는 절차로 여겨지지만, 그는 1536년 1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기에 적법한 승계자가 되지는 못했다.
헨리는 1526년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에게 관심 갖게 되고, 앤과 결혼하기 위해 1527년 캐서린에게 혼인을 무효로 해 줄 것을 요구했다. 헨리는 형수와 결혼한 것 때문이 마음 저변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계속 아들을 사산하자, 레위기(20장21절)를 근거로 혼인 무효를 교황에게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고, 이 때문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헨리 8세와 공의회 앞에 고발된 아라곤의 캐서린 Laslett John Pot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캐서린은 1531년 궁정에서 추방 당했다. 캐서린은 조카인 카를 5세에게 헨리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계획적으로 괴롭힌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결혼 무효 소송에서 그녀의 편에 선 사람들에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 같은 가톨릭계 인물 외에도 헨리 8세의 누이인 프랑스 왕비 메리 튜더(Mary Tudor)와 개신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도 있었다.
혼인 무효를 받아들이고 앤 불린을 왕비로 인정하면 메리와 함께 풍족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헨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영국의 국왕의 왕비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혼인 무효가 되면 메리가 사생아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더 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궁전에서 쫓겨나고, 메리와도 만나지 못하며 궁핍하게 살다가 말년에는 수도원에 의탁하였고, 1536년 병으로(아마도 암으로 추정)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헨리와 메리를 그리워 했다고 한다. 그녀는 형 아더(Prince of Walse)의 미망인(Dowager Princess of Wales)의 예우로 장례식이 치뤄졌다. 헨리 8세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메리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마음만 먹었으면, 친정인 스페인과 조카가 황제인 신성로마제국을 등에 업고, 헨리와 전쟁을 일으켜 몰락 시킬 수 있는 힘도 있었지만, 영국이 내전에 휩쓸리기를 원하지 않았단다.
출처 : Wikipedia
피의 여왕 메리(Blood Mary, Mary I)는 억울하다.
메리 1세는 수장령을 폐지하고 가톨릭으로 돌아가려는 과정에서 종교적 이유로 개신교도를 최소 287명, 약 300명 정도 처형하여,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인 헨리 8세는 37년의 치세 동안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역, 이단 등으로 몰아 57000명, 많게는 72000명의 사람들을 처형했다.
에드워드 6세 시절에도 상당수(5000명이라는 말도 있다)의 가톨릭 교도를 처형했다(에드워드 6세는 15세에 죽었으니 물론 옆에서 부추긴 인물들의 잘못이겠지만),
엘리자베스 1세 역시 종교적 이유에서 였다. 북부의 봉기(Rising of the North)에서만 적어도 750명이 넘는 카톨릭 교도를 처형했다.(후에 사람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사제가 발각되면 역시 처형하였단다.) 교수척장분지형으로 처형한 유력 인사만 따져도 73명.
결론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개신교 신자인 에드워드 6세는 가톨릭 신자인 메리의 왕위 계승을 막기 위해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개신교 신자인 5촌 조카인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계승하려 하었다.(물론 옆에서 권력을 탐하던 인물들이 옆에서 부추긴 것도 있지만) 그러나 왕위 계승법에 따라 메리 1세가 적법하게 여왕에 올랐다. 영국에서는 개신교(성공회는 개신교에 포함된다)가 승자이다. 가톨릭과 단절하기 위해 가톨릭 옹호자인 메리 1세는 피의 메리가 되었고, 개신교 옹호자인 엘리자베스 1세는 성녀가 되었다. 헨리 8세도 그저 여성편력 심한 변덕스럽고 난폭한 왕일 뿐이다.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