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7/2019

The Elder Edda - The Third Lay of Gudrun


구드룬의 세 번째 시(THE THIRD LAY OF GUDRUN).


아틀리(Atli)에게는 헤르캬(Herkia)[90]라는 하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의 내연녀였었다. 그녀는 아틀리(Atli)에게 자신이 씨오드렉(Thiodrek)과 구드룬(Gudrun)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고하였고; 그것 때문에 아틀리(Atli)는 매우 고뇌하고 있었다. 그러자 구드룬(Gudrun)이 물었다:

1. 아틀리(Atli)! 부들리(Budli)의 아들이여! 무엇이 그대를 그렇게 괴롭히고 있소? 그대 가슴에 슬픔을 담고 있소? 왜 전혀 웃지 않는 것이오? 그대가 사람들과 말하고, 나를 쳐다보고 하던 것이 그대의 족장들 보기에 더 바람직할 진데.

아틀리(Atli).
2. 구드룬(Gudrun)! 규키(Giuki)의 딸이여! 헤르캬(Herkia)가 말하길, 여기 내 궁전에서 그대와 씨오드렉(Thiodrek)이 한 이불 속에서, 음탕하게 뒹굴었다니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오.

구드룬(Gudrun)
3. “이 모든 죄목에 대해 나 성스러운 하얀 돌에 대고 맹세하건데, 나와 씨오드렉(Thiodrek)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만 있어야할 일은 그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소;

4. 단 한번 군사들의 왕인 그 명예로운 왕을 포옹한 것 밖에는. 우리는 앉아서 슬픔을 이야기했을 뿐, 우리의 생각은 그런 것이 아니었소.

5. 씨오드렉(Thiodrek)이 서른 명의 전사들과 이곳에 왔지만, 지금 그 중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소. 나를 그대의 형제들과 갑옷 입은 전사로 에워싸시오: 그대의 모든 귀족 친족으로 나를 둘러싸시오.

6. 남쪽사람들의 영웅 삭시(Saxi)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시오; 끓는 가마솥은 가지고 오도록.“

7. 700 명의 사람들이 홀 안으로 들어오자, 왕비는 그 가마솥에 손을 담궜다.

8. “군나르(Gunnar)는 올 수 없고, 나 호그니(Hogni)를 부를 수도 없소: 나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을 다시 볼 수 없소: 호그니(Hogni)는 자신의 칼로 잘못된 복수를 했으니; 나는 나 스스로 죄목에서 깨끗해져야 하오.”

9. 그녀는 눈처럼 흰 자신의 손을 솥 바닥까지 집어 넣어, 그 귀한 돌[91]을 꺼냈다. “자 보시오. 그대 남자들! 보다시피 나 신성한 끓는 솥으로 결백함을 증명했소."

10. 아틀리(Atli)는 상처없는 구드룬(Gudrun)의 손을 보고 가슴 속에서 진심으로 웃었다. “이제 헤르캬(Herkia)가 솥으로 가야하오, 그녀가 구드룬(Gudrun)의 명예를 해치려 했으니.” 헤르캬(Herkia)의 손이 얼마나 데었던지, 그것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비참함을 알 수 없었다. 그 다음 그들은 그 여인을 악취나는 진창[92]으로 보냈다. 그렇게 구드룬(Gudrun)에게 저질러진 잘못은 갚아졌다.

Ordeal of boiling water
끓는 물의 시련을 통한 재판(Ordeal of boiling water)
http://manuscriptminiatures.com/4500/13116/
[Public domain], via Wikimeda Commons


[90] 여기서는 헤르캬(Herkia)가 노예 또는 하녀로 묘사되었는데, 독일 전승의 에르카Erka, 또는 헬케Helche로, 이 전승에 따르면, 에첼(Etzel) 또는 아틀리(Atli)의 왕비였으며, 에첼은 그녀가 죽은 후 크림힐트(Kreimhilt:구드룬)와 결혼했다. 씨오드렉(Thiodrek)이 나오는 이 한심한 부속시는, 허구의 이야기로 다른 시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되고 있고, 가마솥 시련을 통한 재판이 언급된 것으로볼 때, 이 시가 후대의 작품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P.E Muller(II., p.319)는 세문드(Sæmund)가 덧붙인 것으로 보았다.
[91] 원전에는 야르크나스테인(iarknastein)으로 우유빛 오팔을 말한다.
[92] 이 처벌은 옛 독일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끓는 물의 시련을 통한 재판(Ordeal of Boiling Water)은 그리스도교가 소개된 다음 나타난 것으로 처음 언급된 것은 6세기 경이며 12세기 경까지 시행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성당에서 행하는데, 용의자의 손을 끓는 물에 넣었다가(바닥에 있는 물건, 보석이나 반지 등을 꺼내기도 한다) 빼서, 화상을 입었으면, 유죄인 것으로 판결한다.
이 재판을 시행한 다음 3일 후 손을 살펴보는데, 죄가 없다면 신이 손을 치료해줄 것이고, 죄가 있다면 치료해 주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일어난 일이다.

≪다음 편                                      이전 편≫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