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3/2018

(만화) 오르페우스의 창에 숨은 역사 - 2


펠릭스의 라스푸틴(Grigori Rasputin) 암살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펠릭스의 부모가 라스푸틴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아버지는 자신 앞에서 라스푸틴의 이름을 말하지도 못하게 했고, 어머니는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할 정도로. 그런데 황후는 지나이다를 멀리하게 됐단다.) 펠릭스의 라스푸틴에 대한 태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았었기에, 펠릭스가 라스푸틴과 친분을 맺자 주위에서 매우 놀랐다고 한다. 이 둘은 펠릭스와 그의 형 니콜라이의 친구였던 마리아 에브게니예브나(무냐) 골로비나(Maria Evgenyeva (Munya) Golovina)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단다. 라스푸틴은 무냐를 통해 펠릭스가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모양이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라스푸틴은 황제의 가족과의 친분은 소중히 했지만 러시아 귀족들은 믿지 않았는데, 왜 그가 펠릭스에게 계속 관심을 가졌는지 명확하지 않다.(동성애 관계였다는 소문은 있지만, 펠릭스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부정했다고 하니 소문은 소문일뿐.)
황족과의 친분을 끊임없이 추구했던 라스푸틴에게 펠릭스는 황제의 조카딸인 자신의 아내를 소개시켜주겠다고 초대하여(이리나의 아버지는 예전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1세의 손자이고, 어머니는 그 당시 황제인 니콜라스 2세의 여동생. 니콜라스 2세는 니콜라스 1세의 증손자. 이리나와 아버지 쪽으로는 항렬이 같은데 어머니 쪽으로는 삼촌. 족보 어렵다.), 자신의 집 지하실로 유인한 뒤 음식에 청산가리를 넣어 독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독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자 펠릭스가 라스푸틴의 가슴에 총을 쏜 뒤 집 근처의 강의 다리로 가서 강에 시체를 버렸다.(라스푸틴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언제 라스푸틴에 대해서도 찾아 보아야 겠다.)

펠릭스는 항상 러시아의 안녕을 위하여 라스푸틴을 살해하였다고 말했지만, 그 전까지 그는 전혀 정치적인 사건에 관심이 없었고 애국심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라스푸틴을 살해한 진짜 의도는 오히려 개인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라스푸틴의 암살에는 펠릭스 유수포프 외에 니콜라스 2세의 종친이며 피후견인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대공(Grand Duke Dmitri Pavlovich Romanov, 얘도 니콜라스 1세의 증손자)과 러시아 입법의회의 블라디미르 푸리쉬케비치(Vladimir Mitrofanovich Purishkevich)도 가담하였다. 블라디미르 푸리쉬케비치가 먼저 펠릭스에게 편지를 보내 라스푸틴의 암살을 제안하자 했다고는 하지만, 서로 인척이며 친밀한 관계였던 펠릭스와 드미트리와는 달리(황제 니콜라스2세는 펠릭스가 드미트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봐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무척 걱정했었다고 한다. 이 관계도 소문이 그렇고 그랬는지, YouTube에서 둘 사이 묘한 기류가 흐르는 영화 동영상을 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리쉬케비치는 이 둘과 전혀 관련이 없었으므로 이들의 라스푸틴 살해 동기는 아직도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라스푸틴이 죽었다는 소문은 시신이 발견되기도 전에 퍼졌고, 강의 다리에서 핏자국을 두명의 노동자가 발견한 후 경찰들이 강을 수색해 암살 이틀 뒤 시신을 발견했다. 살인 사건으로 수사가 진행되어, 수사관이 펠릭스와 드미트리, 블라디미르를 인터뷰 면담했지만 살인으로 기소하지는 않았다.

Dmitri Pavlovich of Russia Vladimir Purishkevich
드미트리 파플로비치 로마노프대공 블라디미르 푸리쉬케비치
애국심의 발로에 의한 것이라지만 황제의 권위를 실추시킨 것이므로 황제는 그들을 그곳에서 추방하였으며, 덕분에 드미트리는 볼셰비키 혁명 와중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얼마 되지 않는 로마노프 왕조의 생존자 중의 하나이다). 드미트리는 추방 후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을 떠돌며 살다가 50세에 생을 마쳤다.
펠릭스는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니콜라스 2세가 페위된 다음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 동안 많은 자선을 베풀며 유수포프 가문이 쌓아온 명성 때문에 혁명가들도 유수포프 가문에 호의적이었고(유수포프의 이름을 딴 공동체도 있다고 함), 펠릭스 유수포프가를 자신들의 지지자라고 여겼지만, 사실 펠릭스는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모이카의 유수포프 궁을  군막사로 사용하자 박물관으로 사용해야 할 건물을 군막사로 사용한다고 불평했다고 함). 혼란스러운 상황에 환멸을 느낀 그는 얼마간의 보석과 가보를 가지고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에서 정착했다.
프랑스에서 쿠티르(Couture)사업도 하고  자선도 하며 살았지만, 사업수완이 나쁘고, 대공황이 덮치며, 사업을 접었고, 씀씀이가 커서 가산을 탕진했다.  그러나 회고록 집필과 1932년 MGM이 만든 "라스푸틴과 황후(Rasputin and the Empress)" 란 영화에 사생활 침해와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어(이리나를 모델로 한 역할이 라스푸틴에게 유혹 당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함) 승소한 다음 그럭저럭 풍족하게 살다가 1967년 9월 27일 여생을 마쳤다.  이상한 소문도 많고 말도 많았지만, 이리나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었고, 그가 죽은 뒤 슬픔에 잠겨있던 그녀는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라스푸틴의 살해에 영국 요원이 관련되었다는 이론도 있다. 라스푸틴이 황제에게 독일과의 전쟁을 반대하고 전쟁에서 철수하기를 촉구했고, 그렇게 되면 독일이 서부전선으로 군대를 증진시킬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전쟁을 계속하도록 하기 위해 영국 요원이 라스푸틴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다는 것이다. 펠릭스와 함께 옥스포드 대학에 다녔던 오스왈드 레이너(Oswald Rayner)가 직접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했거나, 그가 직접 라스푸틴을 쐈다고(다 된 밥상에 영국 얹기?). 하지만 사학자들은 살해 현장에 영국 요원이 있었다는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며, 별로 신빙성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Rasputin: The Untold Story의 저자인 미국 학자 조셉 퍼먼(Joseph, T Furhmann)은 암살 방식의 어설픔을 볼 때 아마추어가 계획 실행한 것으로 보이므로 펠릭스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http://www.alexanderpalace.org/lostsplendor/에 가보면 그가 쓴 회고록 "Lost Splenlor"를 읽을 수 있다.



끝..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Felix_Yusupov
https://en.wikipedia.org/wiki/House_of_Yusupov
https://en.wikipedia.org/wiki/Zinaida_Yusupova
https://en.wikipedia.org/wiki/Grigori_Raspu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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