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특정 파일 읽는 것을 자꾸 실패하길래 하드디스크를 점검해 보았다. E 드라이브에서는 읽는 file을 F 드라이브로 복사해 오면 읽기 오류가 나는 것이다.
HDDScan 이란 프로그램으로 점검해 보았는데, 제일 빠르게 검사하는 Butterfly read를 진행시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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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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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럽게 더웠던 올 여름
지난 해와 비교했을 때, 올 여름 더위는 생각보다 늦게 찾아왔고, 추분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전기요금 폭탄 맞을까 벌벌 떨며 켜던 에어컨.
여기 저기서 하루 종일 틀어 놓아도 생각보다 전기요금이 크게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백 만원도 넘는 비싼 물건 더위에 쩔쩔 매며 장식품 처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 생각되어 시험 삼아 그냥 전기요금 생각 않고 틀어 놓아 보았다.
8월에 제일 전기 사용량이 많았던 날과 적었던 날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전용면적 85m²에서 실외기 최대능력 9800W 스탠드형 에어컨을 28℃로 하루 종일 켜 놓았을 경우이다. 집안 방문 다 열어 놓아 전체 면적을 냉각시켰다. 선풍기와 에어 서큘레이터를 함께 사용하면 28℃ 정도 에서도 쾌적하게 생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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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사용량 많은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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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사용량 적은 날 |
더 더웠던 날과 좀 덜 더웠던 날 간의 사용량 차이로 볼 때, 한 달 동안 에어컨을 끄지 않고 하루 종일 사용한다면, 300KWh정도 될 것으로 예측된다.
한전ON 전기요금계산에서 주택용(저압), 8월 달로 300KWh일 때의 에어컨 사용 전기 요금만 계산했더니 46530 원이 나왔다.
전체 전기 사용량으로 계산하면 누진요금 때문에 상당히 달라 지지만, 평소 전기 사용량이 300KWh라면, 8월 한 달 전기 사용량 600KWh로 15만원이 되지 않는다.
여름철 한 달 전기요금 15만원으로 그 더위를 쾌적하게 지낼 수 있다면, 싼 가격이다.
티레(Tyre)의 페니키아(Phoenicia)의 왕 아게노르(Agenor)와 왕비 텔레파사(Telephassa)의 딸인 에우로파(Europa)에게 반한 제우스(Zeus)는 아름다운 하얀 수컷 소의 모습을 하고 왕의 소 무리에 섞여 기회를 보고 있었다. 시녀들과 함께 꽃을 따러 나온 에우로파가 하얀 소를 보고쓰다듬다가 그 등에 올라타자, 기회를 보던 제우스는 에우로파를 등에 태우고 그대로 달려 바다로 뛰어들어 크레테로 헤엄쳐 갔다. 의 앞에 나타난 제우스는, 그녀가 아름다운 소를 보고 다가와 쓰다듬다가 그 소의 등에 올라타자 그대로 바다를 건너 크레테로 갔다.
크레테에 도착한 제우스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푸른 잎이 울창한 나무 아래에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에우로파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들, 미노스, 라다만투스, 사르페돈을 얻었다. 제우스는 에우로파를 매우 사랑했기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세 가지 귀한 선물을 했다.
첫째, 청동으로 만든 거인 탈로스(Automaton Tal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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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들고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청동 거인 탈로스 BnF Museum,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둘째, 사냥감을 절대 놓치지 않는 사냥개 라일라프스(Laelaps)
세째, 표적을 절대로 비켜가지 않는 투창(Javelin)
이 선물들은 에우로파가 크레테의 왕 아스테리온(또는 아스테리우스)와 결혼하여 크레테의 첫 번째 왕비가 되며, 아스테리온의 소유가 되었고, 크레테를 지키는데 사용되었다. 아스테리온이 죽은 후에는 왕위를 이은 미노스에게 상속 되었다.
탈로스는 크레테를 지키다 최후를 맞았다. 이아손(Jason)이 황금양털을 성공적으로 얻은 다음 배를 타고 돌아가던 중, 크레테 섬에 다가오자 탈로스는 이를 막기 위해 커다란 바위를 들어 배를 공격했다. 이아손의 연인이었던 메데이아(Medea, 미노스의 아내인 파시파에의 조카이다.)의 계략으로 탈로스는 스스로 발목에 있는 못을 뽑아, 모든 피(이코르:ichor)가 흘러나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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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크리스가 투창과 사냥개를 케팔로스에게 내어 주고 있다. Laurent de La Hyre, CC0, via Wikimedia Commons, Link |
프로크리스는 남편인 케팔로스(Cephalus)와 갈등을 겪은 후 화해의 징표로 이 투창과 사냥개를 그에게 주었다. (이 창과 사냥개를 아르테미스가 프로크리스에게 주었다는 문헌도 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Laius)가 자신의 아들 오이디푸스의 손에 죽자 그의 처남인 크레온(Creon)이 섭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잡자마자, 테베 사람들이 범한 죄로 신(아마도 디오니소스)의 분노를 사게 되어, 테베는 절대 잡히지 않는 여우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디오니소스가 보낸 이 거대한 여우(테우메소스의 여우:Teumessian fox)는 테베를 돌아다니며, 가축을 죽이고 아이들을 잡아 먹었다. 암피트리온(Amphitryon)이 약혼한 알크메네(Alcmene, 헤라클레스의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크레온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크레온은 절대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도움의 대가로 테우메시안 여우를 잡아 줄 것을 요구했다.
프로크리스의 남편 케팔로스는 암프트리온의 요청으로 라일라프스를 데리고 절대 잡을 수 없는 테우메시안 여우(Teumessian fox)를 사냥하러 나갔다. 절대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개와 절대로 잡히지 않는 여우의 질주는 끝날 수 없는 역설이었는데, 이 모순된 운명을 불쌍히 여긴 제우스가 나타나 두 짐승을 돌로 만들고 하늘로 던져 별자리로 만들었다. 사냥개인 라일라프스는 큰 개자리(Canis Major) 그리고 테우메소스의 여우는 작은 개 자리(Canis Minor)가 되었다.
절대 표적을 놓치지 않는 투창은 케팔루스가 ......
제우스는 에우로파가 죽은 다음 그녀를 하늘에 올려 성단으로 만들고 자신은 다시 황소의 모습을 하고 그 성단에 들어가 별자리의 모양을 만들었다. 이것이 황소자리(Taurus)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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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 당하는 에우로파 Stefano della Bella, CC0, via Wikimedia Commons, Li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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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석에 앉아 있는 미노스, 아이아코스, 라다만투스(순서는 모름) Ludwig Mack (1799-1831) 석판화, Bildhau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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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암소를 만들고 있는 다에달로스와 파시파에 Jean Lemaire,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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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타우르스(Minotaurs) (외롭고 슬퍼 보인다) Enrique Palmeros Montúfar (Zeyrus Kuilg),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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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주는 아리아드네 Antoinette Béfor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Queen을 우리나라 말로 해석할 때 여왕 혹은 왕후, 왕비라고 한다. 여왕과 왕후는 엄연히 역할과 직함, 지위가 다른데,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궁금했는데, 역시 구별하는 호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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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Queen of United Kingdom Donald McKague,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우리나라에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영국에는 메리 1세, 메리2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앤, 빅토리아,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 스페인의 이사벨라 2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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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Queen consort of France (Henr II, 1547.03.31 – 1559.07.10) Queen regent of France (Charles IX, 1560.12.05 – 1563.08.17) Workshop of François Cloue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보통 역할은 왕의 조력자로서, 왕실 내의 인물들을 관리하고, 자식 교육, 왕실 사람들이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관리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 유럽에서 왕의 혼인은 보통 다른 나라의 왕족과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화적 교류자의 역할도 했다. 왕의 총애가 큰 경우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기도 하는데, 왕을 뒤에 업은 권력이으로 왕이 사망하면, queen 직함 외에 아무 힘도 가질 수 없다.
왕이 사망하면 queen consort는 queen dowager가 된다. 이전 왕후로 왕족의 대우를 받고 살지만, the queen이라 언급되지 않고, a queen이라 한다(위의 두 queen은 the Queen이다.).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우리말하고 달라서 해석은 못하겠다. 왕이 일찍 죽어 빨리 바뀌면, 여러 명의 queen dowager가 존재할 수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대왕 대비, 왕대비). 주권국이 왕국이 아니면 역시 Empress dowager, princess dowager 등 이다.
왕이나 여왕의 어머니로, 왕후였던 사람이다.
대부분의 queen dowager는 queen mother이기도 하지만,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queen mother는 되지 못하고, queen dowager로 남게 된다. queen mother 였다가 왕인 자식이 먼저 죽으면, queen mother라는 직함은 잃고 queen dowager로 남는다.
왕이 자식에게 양위하고 자식이 새로 왕위에 올랐다면, 상왕의 Queen consort는 Queen dowager는 아니지만, Queen mother가 된다.
딸이나 아들이 왕이 되었지만, 왕후였던 적이 없는 여성은 왕의 어머니로서 왕족의 대우는 받지만 Queen Mother란 직함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대입해 본다면, 유명한 왕후 중 선조의 비였던 인목대비(아들 영창대군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와 영조의 비였던 정순왕후 (정조는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어 왕세손이 되었다.)는 Queen mother가 되지 못한 Queen Dowager 이다.
이 기준에서 인수대비는 세자빈이었지만, 의경세자가 일찍 죽어, 왕후가 된 적이 없기 때문에 Queen이란 호칭 자체를 붙이지 못하며, Queen Mother라 불릴 수 없다. 사실 성종도 예종(성종의 작은 아버지)의 아들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성종의 어머니도 아니니, 왕후가 되지 못한, 왕의 어머니도 아닌 셈이다.
왕이 외국으로 오랜 기간 출정을 나가 자리를 비울 때, 혹은 몸이 아파 직접 통치를 못할 때, 자신의 권력을 왕후에게 위임했을 경우 왕후는 Queen Regent가 된다. 또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세워졌는데, 너무 어려 직접 통치하기 어려워 왕태후가 섭정으로 선정되었을 경우도 Queen Regent가 된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경우 왕위 계승권자 중 순위가 가장 높은 성인이 섭정을 하거나 따로 섭정관을 임명 하므로, Queen Regent는 매우 드물다.
헨리 8세가 프랑스로 출정갔을 때,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왕권을 위임하고 갔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아라곤의 캐서린은 Queen Regent였고, 말년 건강 악화로 통치를 제대로 못할 때는 캐서린 파가 Queen Regent 였다. 헨리 8세가 죽고 어린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이 때는 따로 섭정관이 임명되었기에, 캐서린 파는 queen dowager 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린 임금이 왕위에 오르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이 경우 Queen regent이다. 세조의 비였던 정희왕후(성종 수렴청정), 중종의 비 문정왕후(문종), 명종의 비 인순왕후(선조), 영조의 비 정순왕후(순조), 순조의 비 순원왕후(헌종, 철종)가 있다. 세자빈이었다가 추존 왕비가 된 효명세자의 빈 신정왕후(고종)는 Queen Regent는 아니고 그냥 Regent 이다.
다섯 번째, 헨리가 남성난임이었다.[11] 출처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세계적 사회 통념 상 전통적으로 건강한 자녀의 출산은 남성이 발기부전과 같은 물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능 장애를 보이지 않는 이상, 거의 절대적으로 여성의 책임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불임의 원인으로 남성도 주목되기 시작하여, 염색체와 음식, 운동여부와 같은 생활 습관을 조사하기 이르렀다.
정자의 산화 스트레스(체내 활성 산소가 많아져 생체의 산화 균형이 무너진 상태)와 DNA 절단과 같은 정자의 기능에 결함을 가져오는 생식력 약화 요인들이 반복적인 유산을 일으키며 보통 임신 기간 29주 이전에 임신 실패로 나타난다는 다는 연구 보고가 증가 되고 있다고 한다.
헨리 8세는 14년의 실질적 결혼 기간 중(결혼한 상태이지만, 부부관계가 없었던 시절 제외한 기간), 처음 두 아내는 열번의 임신에 일곱 번의 유산과, 사산을 했으며, 살아남은 아들은 없었고, 세 번째 아내는 첫 아이를 출산 후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헨리는 아내를 비난했지만, 아들 계승자를 얻지 못한 이유는 제대로 설명 된 적이 없다. 기록에 따르면 앤과의 결혼 시절 부터 발기 부전과 같은 성기능 장애를 겪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비교적 건강했던 시절 그의 첫 아내와 두 번째 아내가 모두 그렇게 많은 사산과 유산을 겪었다는 것은 아내들 보다는 헨리에게 결함이 있을 확률이 크다고 본다. 엘리자베스 블런트는 정부였기 때문에 첫 아이이자 아들인 헨리 피츠로이 외에 기록이 없어 그 이후 유산이나 사산을 겪었는지 알 수 없지만, 헨리와 헤어진 후 두 번 결혼하여 어른까지 성장한 건강한 아이를 6명 두었다는 것과, 살아 남은 헨리의 자손들이 자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 헨리에게 문제가 있을 확률을 더 크게 한다고 설명한다.
헨리의 가족 출산력을 살펴보면, 외가 쪽은 아주 출산력이 좋아 외할아버지 에드워드 4세는 적자 10명, 사생아 5명 총 15명의 아이를 낳았고 한 명만 유아 때 죽었다. 에드워드 4세의 아버지 리차드 플랜테저넷( Richard Plantagenet)은 세실리 네빌(Cecily Neville) 과의 사이에서 12명의 적자를 낳았고 8명이 성인에 이를 때까지 살았다.
헨리의 친가 쪽은 출산력이 그보다 낮았다.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 요크(에드워드 4세 딸)은 6명의 아이를 가졌는데, 한 명은 어려서 죽고 아더는 15세때 죽었다. 헨리 7세는 외동이었는데, 아버지는 26세때 죽었고, 어머니인 마가렛 뷰포드는 세 번 재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다. 헨리의 아버지 쪽 증조 할아버지 역시 외동이었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앤 불린 가족의 출산력은 상당히 좋다.
헨리와 그의 아내에게서 나타난 출산 문제는 그 시절 그와 비슷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부부(하워드와 시모어을 가계들을 조사)들의 출산력을 조사해 비교해 보아도 비정상이었다. 그 조사에서 보통 5-6명의 아이를 낳았고 유산이나 사산은 약 10%정도 일어났다.
헨리 8세의 잠재적인 불임 요인으로, 젊어서는 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던 것, 30대 들며 급격히 살이 쪄 말년에는 180kg에 달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궁정 기록에서 식단을 살펴 보면, 끊임없는 기념식, 화려한 파티, 연회를 열었고, 자유롭게 술을 마셨다. 최고의 음식은 다양한 고기였기 때문에 지나친 고기/단백질을 섭취했고, 많은 빵으로 탄수화물을 섭취했으며, 채소나 콩류는 거의 먹지 않았다. 과일은 익히거나 설탕에 절여 먹었다. 그 시절 식사는 군주의 권력을 상징하기도 했기 때문에 아주 푸짐한 비싼 음식으로 채워졌다.
젊어서는 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고(심한 운동은 몸에 산화 스트레스를 일으킨다), 영양 불균형으로 비타민C 부족에 따른 괴혈병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비만으로 인한 온갖 성인병(당뇨, 고혈압)에, 변비, 통풍, 다리의 거대한 개방성 궤양으로 인한 통증은 생식력 및 정자 품질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자에 손상(DNS Fragmentation)을 입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헨리 8세의 난임으로 원하는 후계자를 얻지 못했을 것이란 이론이다.
여섯 번째, 헨리가 매독 환자였다.[12]
매독(Syphilis)은 매독균(Treponema pallidum)에 의한 세균성 전염병이며 성 접촉에 의해 전파되는 성병으로, 성 접촉에 의해 전염되는 것(후천성 매독)이 일반적이나, 매독균에 감염된 여성이 임신했을 때, 임신이나 출생 중 태아에게 수직 감염(선천성 매독)이 되기도 한다.
감염 기간과 단계에 따라 1기 매독(세균의 침범부위에 발생하는 무통성 궤양), 2기 매독(피부 발진, 점막의 병적인 변화), 잠복 매독(증상은 없는데, 감염은 되어있는 상태, 전염은 가능), 3기 매독(고무종 매독, 심혈관 매독, 신경매독, 3기에서는 감염성이 없다.)로 나뉜다.[13]
매독균이 뇌, 수막, 척수로 침범하여 나타나는 신경 매독은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 행동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치매가 동반되는 기억상실, 판단 장애, 감정 조절 장애, 정신 착란을 보인다. 더 진행되면, 치매와 사지마비가 심해지고 진행성 보행실조도 나타날 수 있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3-5년 이내에 사망한다. [14] 중년 이후 헨리 8세의 급격한 성격변화와 이상행동, 건강악화 등을 이것으로 설명한다.
임산부에게서 태아에게 매독이 감염된 경우, 수 많은 질병과 장애를 유발하지만, 감염된 태아 중 40%는 출생 전후기에 사망한다.[15] 아라곤의 캐서린과 앤 불린이 겪은 여러 번의 유산과 사산, 첫 아들의 출생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것을 선천성 매독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 매독 치료 방법은 환자를 침대에서 6 주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해 놓고, 수은으로 치료를 하는데, 헨리 8세에게 그러한 치료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12]. 헨리가 매독 환자였을 경우, 성관계를 한 상대방에게 옮기는데, 그의 정부였던 엘리자베스 블런트나 메리 불린 모두 결혼 하여 건강하게 성장한 여러 자녀를 낳은 것을 보면, 그가 매독 환자였을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아무 증거도 찾지 못했어도, 아직 몇몇 사람들은 헨리 8세의 몸이 잠복 매독 시기에 들어가 그 자신도, 의사들도, 그의 아내들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을 있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헨리의 아이들 중 그렇게 많은 수가 성인으로 크지 못하고 사망했을까.
일반적으로 건강한 부부가 1년 동안 피임하지 않고 규칙적인 성관계에 의해 임신을 시도하는 경우 85%가 임신에 성공한다고 한다. 말년 비만에 성인병 종합병원이 되기 이전, 헨리 8세가 비교적 건강했던 아라곤의 캐서린, 앤 불린 그리고 제인 시모어와 부부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규칙적으로 임신이 됐었다.
그러나 헨리의 아내들은 여러 번의 유산과 사산을 겪었다. 아라곤의 캐서린은 여섯 번(혹은 일곱 번)의 임신에서 한 명의 아이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고, 앤 불린은 세 번의 임신에서 한 명의 아이만 살아남았다. 제인 시모어는 첫 임신 후 출산 합병증으로 죽었고, 첫 아이인 에드워드 6세는 성인이 되지 못하고 15세에 죽었다. 알려진 사생아 중 헨리 피츠로이도 17세에 죽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후손은 딸 두 명 뿐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임신한 아이의 거의 70%(11명 중 7명)가 유산, 사산 신생아 사망이 되었는데, 이 수치는 그 시절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아주 높은 수치라고 한다.
위생이 불결하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 영아 사망률이 높고,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 일도 많았다고 하지만, 그 시절, 최고의 의사, 최고의 위생 환경, 최고의 음식을 누릴 수 있었던 왕과 왕비에게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렇다 보니 이에 대한 가설도 많다.
첫 번째,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불린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전이 아들을 낳지 못해도 후궁이 낳은 아들이 왕위를 이었고, 중전이 쫓겨 나거나 하지 않았지만, 중전은 임금에게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은 철저히 기독교 교리를 따랐기에 그런 것은 없었고, 혼외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왕위 계승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것이 헨리 8세와 앤이 왕비 쫓아내기를 시작한 이유일 것이다.
스트레스는 호르몬 불균형을 일으키며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여성의 임신과정에서는 여러가지 호르몬의 작용으로 배란, 자궁내막 증식, 착상, 임신 유지가 일어나는데, 스트레스로 어느 한 과정이 깨지면, 임신에 어려움이 일어난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내분비계를 무너뜨리고 혈액 순환 장애를 일으켜, 난소 기능을 저하 시키는데, 조기 폐경
까지 일으킨다고 한다[1]. 남성의 경우 두 차례 이상 스트레스 유발을 경험한 사람은 운동성있는 정자의 비율이 적고, 정상형태의 정자 비율도 낮았다. 지속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고, 정자의 생산도 감소시킬 수 있다고 한다[2].
아라곤의 캐서린과 앤 불린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앤의 강한 성격은 헨리 8세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것을 참지 못해 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헨리 8세도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끊임없는 압박감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칩작이 유산 및 사산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두 번째, 아라곤의 캐서린 의 경우, 가장 단순한 이유지만, 가장 일어날 확률은 낮은, 그러나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이유. 그냥 우연의 일치이다. 의학 기술도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고, 위생 상태도 나빠서, 어찌 어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헨리 8세의 형제는 7남매 중 1명은 사산 2명은 3살 이전에 죽었고, 아라곤의 캐서린의 형제는 7남매 중 2명이 사산되었다. 양쪽에서 모두 사산된 형제가 있다는 내력도 있기 때문에, 7명 중 6명(또는 6명 중 5명)이 사산 및 신생아 사망이어도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3] (그런데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이 죽었는데.)
세 번째, 앤 불린의 경우, 헨리 8세는 혈액형이 Rh +(양성)이고, 앤 불린은 Rh -(음성)이기 때문이다.[4]
카를 란트슈타이너가 붉은털원숭이(Maccacus rhesus)의 적혈구를 토끼나 기니피그에 접종하였더니 항체가 형성되었고, 이 면역혈청을 다시 원숭이의 적혈구와 반응시키니 응집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항혈청에 사람의 혈액을 반응시키면 응집이 일어나는 경우(Rh+)와 일어나지 않는 경우(Rh-)가 있는데, 이것으로 혈액형을 구분하며 붉은털원숭이의 이름의 첫머리에서 Rh를 따와 이름 붙였다. 현재는 50개가 넘는 항원이 발견되었는데, 보통 Rh형을 구분하는 항원은 D로 명칭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Rh+인 사람이 99% 이상, Rh-인 사람이 1%미만인데, 유럽에서는 Rh+인 사람이 86%, Rh-인 사람이 15% 정도 된다[5]. Rh+가 현성유전자, Rh-잠성유전자이다.
Rh-의 여성이 Rh+의 남성과 아이를 가지면, 아이는 일반적으로 Rh+의 혈액형을 갖게 되는데, 이런 경우를 혈액형 부적합 임신이라고 한다. 이 경우 두 번째 아이부터 태아신생아 용혈 질환이 발생한다. 태아신생아 용혈 질환은 일종의 동종면역 질환으로 산모의 면역글로불린 G 분자(항체의 일종)가 태반을 통과해서 태아 적혈구의 항원을 공격하여 세포를 분해, 파괴하는 용혈반응을 일으킨다. 용혈이 심해지면 빈혈, 저산소증, 심부전, 부종이 일어나고, 파괴된 혈구 생성을 위해 간이나 비장 비대해진다. 적혈구가 파괴되면 빌리루빈이 생성되는데 일반적인 경우에는 간에서 수용성으로 변해 배출되지만, 용혈 질환처럼 너무 많으면 처리되지 못한 비수용성 빌리루빈이 뇌와 척수의 혈뇌장벽을 통과하여 핵황달을 일으키고, 심하면 사망에 이르게 한다.[6]
태반을 지나 혈액이 이동하는 태아-산모 간 출혈은 출산, 유산, 임신 중 태반 파열(주로 외상에 의해 일어난다.) 등의 경우에 일어난다. Rh- 여성의 첫 임신에서 산모가 아직 항체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나지만, 출산 중 태반을 통해 태아의 혈액 에 노출된 산모의 몸에 Rh 항원에 대한 항체가 형성되게 된다. 두 번째 임신부터 산모 몸 속에 있던 항체가 태반을 통과하여 태아 적혈구에 있는 항원을 공격해 태아신생아 용혈 질환을 일으킨다. 현대에는 첫 아이 임신 28주-32주 사이에 한 번, 분만 후 72시간 이내에 한 번 항 Rho(D)면역글로불린을 주사하면 다음 임신에서 혈액형 부적합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지만, 그 시대에는 대부분의 경우 태아가 사망에 이르렀다.
앤 불린의 경우 첫 아이는 건강하게 출산, 그 이후 계속되는 유산과 사산은, 산모의 Rh 혈액형 부적합 임신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네 번째, 헨리 8세가 맥레오드 증후군(MacLeod Syndrom)을 가진 Kell 양성 혈액형군이다. 이는 혈액형 부적합 임신에 따른 태아의 유산, 사산 뿐아니라, 헨리 8세의 중년 이후 급격한 성격 변화도 설명할 수 있다고 생물고고학자 카트리나 뱅크스 위틀리(Catrina Banks Whitley)와 인류학자 키라 그래이머(Kyra Kramer)가 연구를 통해 주장했다.[7]
Kell 혈액형군은 1945년 태아신생아용혈질환을 유발한 항체(항-K로 표시)를 지녔다고 처음으로 밝혀진 환자 켈러허(Kelleher)라는 임산부의 이름에서 따왔다. Kell 혈액형의 항원은 25종이나 되는데, 가장 강력한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항원인 K 항원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Kell 양성이 발견된 적은 없고, 백인의 경우 약 9%, 흑인 약 2%, 아랍인 약 25% 가 항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8]
Kell 혈액형군 역시 , Kell 음성 여성이 Kell 양성 아이를 가질 경우, 그 임신은 혈액형 부적합 임신이 되며, 첫째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지만, 다음 아이부터는 태아신생아 용혈 질환의 발생으로 유산이나 사산되게 된다. 전형적인 혈액형 부적합 임신 양상을 보인 앤 불린 외에도 살아 남은 아이들인 엘리자베스 블런트의 헨리 피츠로이, 제인 시모어의 에드워드 모두 첫 번째 아이였다. 아라곤의 캐서린의 경우 첫 아이가 사산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긴 하나, 첫 임신에서도 Kell 항원 민감성이 영향을 미친 사례가 있었으며, 다섯 째인 메리가 건강하게 태어난 것은 그녀가 헨리 8세에게서 잠성 유전자를 물려 받아 K 항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위틀리와 크래이머는 주장했다. 그들은 헨리 8세의 어머니 쪽 증조 할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케타(Jacquetta of Luxemburg)에게서 Kell 항원 양성 유전자가 전파한 것을 보고 있다. 자케타의 여성 후손은 일반적으로 후손을 잇는데 문제가 없었으나, 남성 후손들은 실패 양상이 관찰되었다고 설명했다. 
맥레오드 증후군은 X 염색체에 연관된 Kell 혈액형군 체계의 잠성 유전 장애이다. X-염색체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X 염색체가 두 개인 여성의 경우 두 개 다 문제 염색체이어야 나타나 나지만, 남성에게는 바로 나타난다. 이 증후군은 젊어서는 증상이 없다가 30대 에서 40대에 발현하기 시작한다. 말초신경병증, 신경병증, 용혈성 빈혈 등이 나타나고, 또 팔 다리가 통제되지 않고 움직이는 무도병, 경련, 발작, 행동장애 및 치매와 유사한 인지장애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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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년의 헨리 8세 Attributed to Meynnart Wewyck,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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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년 경의 헨리 8세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얼마나 급격하게 변했던지,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타키(David Starkey)는 "두 명의 헨리가 있다. 늙은 그와 젊은 그"라고 말했다. 젊은 헨리는 운동과 음악, 아라곤의 캐서린을 사랑했으며, 잘생기고, 활력 넘치는, 너그럽고 헌신적인 통치자였다. 늙은 헨리는 맛있는 음식을 탐닉하고,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으며, 정치적 반대파뿐 아니라 같은 편도 눈 밖에 나면 거리낌없이 제거할 정도로 돌변했다" 고 묘사했다고 한다.[9] 또 중년부터 엄청나게 살이 쪄 비만과 다리 질환으로 거의 움직이지도 못해 말년에 가마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이러한 보행불가도 다리에 위축증이 나타났다는 맥레오드 증후군의 사례와 일치한다.
맥레오드 증후군 환자는 같은 X 염색체의 근접한 위치에 있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나타나는 만성육아종성 질환도 함께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9], 헨리 8세의 만성적인 다리 궤양도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정신적 정서적 불안정성은 죽기 십 여 년 전 부터는 일부 사람들이 행동 정신 장애로 분류할 정도까지 증가했는데, 이러한 급격한 성격 변화도 맥레오드 증후군의 증상이라고 그들은 설명했다.
위틀리와 크레이머는 헨리 8세의 DNA 테스트를 위해 허가를 구하고 있다고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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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rin Parr After Master Joh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아버지는 헨리 8세에게 신임받는 관리였고, 어머니는 캐서린 왕비의 시녀였으며, 캐서린 왕비는 그녀의 대모였다. 캐서린 이란 이름은 아라곤의 캐서린 이름을 딴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가톨릭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어느 시점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일반 귀족 여성과 비슷하게 교육 받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커서 계속 공부했다고 한다. 프랑스어, 라틴어, 이탈리어에 능통했고, 왕비가 되어서는 스페인어까지 공부했다.
헨리와 결혼 전 이미 두 번(에드워드 버그 경(Sir Edward Burgh), 3대 라트머 남작 존 네빌(John Nevill, 3rd Baron Latimer))이나 결혼한 경력이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지만, 나이 많은 남편과 결혼해 돌봐야 했지만, 살뜰히 챙겼고(두 번째 남편의 이름이 새겨진 성경을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고 한다.), 사별한 관계로 상당한 유산을 물려 받았다.
두 번째 남편이 죽은 후 영지인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은총의 순례 때 북쪽에서 고생했던 캐서린 파는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어머니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의 인맥을 이용하여 공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메리의 집에 시녀로 들어가 친분을 쌓았다. 거기서 헨리 8세의 관심을 받게 된다. 늙고 병든 헨리는 자식을 얻을 생각이었기 보다는 두 번의 결혼으로 나이 많은 남편을 돌 본 경험이 있고, 의붓 자식들에게도 살뜰 했던 성품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듯 하다.
캐서더린은 제인 시모어의 오라비인 토마스 시모어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헨리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왕비에 올랐다.
헨리의 세 자녀와 모두 잘 지냈으며,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를 교육시키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 복권시키는 3차 계승법령(1543년)을 통과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다.
개신교 신자였고 그와 관련하여 책도 출간하였다. 영국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 최초의 여성이란다. 상당히 급진적 성향의 개신교들 후원하였기에, 반-개신교 정서를 불러 일으켜서, 헨리 8세를 분노하게 만들었고(헨리는 무늬만 개신교이지 속은 가톨릭이다.), 체포 명령까지 내렸으나, 바로 고개를 수그리고 헨리에게 복종함으로써 화를 면했다.
1544년 헨리가 프랑스로 출정을 나갔을 때는 섭정을 성공적을 수행하기도 할 정도로 정치적 역량도 뛰어났다. 왕이 죽은 후 유언에 따라 정치에는 관여하지 못했지만, 왕태후(queen dowager)로써 제대로 대접 받도록 허락 받았으며, 엘리자베스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6 달 후 제인 시모어의 오라비인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했는데,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헨리가 죽은 후 너무 빨리 하는 바람에, 메리와 에드워드는 매우 불쾌해 했다고 한다. 35살에 4번의 결혼 중 처음으로 임신을 하게 된다. 이 기간 토마스 시모어는 엘리자베스에게 흑심을 보였는데(잠옷 입고 엘리자베스에게 가서 간지럼을 태운다거나, 엉덩이를 때린다거나 하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상황이 극한에 치닫기 전까지는 캐서린도 그냥 묵인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엘리자베스를 안토니 데니 경(Sir Anthony Denny)의 집으로 보냈다.(토마스 시모어가 인물이 좋았다는데, 그 때문인지 엘리자베스도 연애 감정까지 갔는지 모르지만, 호감을 가졌었다고 한다.( 토마스 시모어 나쁜 놈. 엘리자베스는 겨우 14살 이었다.) 메리는 선견지명이 있었는지(새엄마의 이른 재혼으로 화가 나서라지만), 캐서린이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하자 엘리자베스에게 당장 그 집에서 나오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캐서린 파는 토마스를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토마스는 그리 사랑하지 않았고, 야심만 컸던 모양이다. 캐서린과 결혼 하기 전 이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했었지만 뜻 이루지 못했고, 캐서린이 죽은 후 또 엘리자베스랑 결혼 하려고 했으나, 데니 경에게 보내지기 전의 사건으로 캐서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거절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6세의 섭정 자리를 얻으려고 무리하다가 결국 반역으로 처형당했다.
1548년 캐서린은 첫 딸이자 외동딸인 메리 시모어(Mary Seymour; 의붓 딸인 메리의 이름을 땄다)를 낳고 산욕열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그렇다면 헨리 8세는 어떤 아내를 제일 사랑했을까
헨리는 공식적으로 제인 시모어를 제일 사랑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제인 시모어가 심기를 거슬렀을 때, 앤 불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거할 수 있다고 협박한 것을 보면, 그렇게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 협박은 앤 불린이 결백한데도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래 살아서 헨리의 심기를 거스릴 일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 지 모른다.(하지만, 제인 시모어는 순종적인 여인이었고, 아들이 있으니 죽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결국 그렇게 원하던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그 난리를 피웠기에, 그녀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결혼 3 년 만에 죽여? 처음에 사랑에 빠졌을 지는 모르나, 내 눈에는 그 근원이 소유욕으로 보인다. 앤을 갖지 못해서 집착했던 것이고, 가지고 난 다음에는 아들 후계자를 낳는 목적을 이루어 주지 못하니 가차 없이 제거했다.
그렇게 찬사를 보냈던 캐서린 하워드의 경우는, 49세 아저씨가 17(또는 16)살 소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라...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랑했다면, 단지 결혼할 때 처녀가 아니었다고 죽이지 않는다. 설령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추방할지언정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젊은 여인에 대한 잠시의 미혹이었다 본다.
클레페의 앤은 성적 이끌림은 전혀 없었지만, 호감은 있었던 사이. 헨리도 인정한 사랑하지 않은 사람.
캐서린 파와 결혼했을 당시 이미 헨리는 부부관계를 할 수 없을 건강 상태였다고 학자들은 본다. 아마도 사랑이나 성적 이끌림 보다는, 나이 많은 남편들과 살았던 캐서린 파에게서 안정감을 찾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현명하며, 성숙하고 너그러운 성품이고, 전 남편들의 의붓 자식들에게도 잘 했으니, 자기 자식, 특히 에드워드 6세를 잘 키워 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고, 도전 받는다 싶으면 가차 없었다. 캐서린이 현명해서 죽음을 벗어났지, 앞의 부인 같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결혼할 당시 아라곤의 캐서린은 24살, 헨리 8세는 18살 이었다. 헨리 7세가 죽기 전, 결혼할 수 있는 나이인 14살이 되었을 때, 이미 결혼을 거부 했었으니, 결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결혼했다. 바람을 피우기는 했지만, 월경이 끊기기 전에는 꾸준히 아라곤의 캐서린을 찾았다고 한다. 기록에는 그 둘의 사이가 유별나게(unusual) 좋았다고 되어 있단다. 결혼 초기 헨리가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아주 깊이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프랑스로 출정 나가면서 섭정을 맡길 정도로 신뢰도 했고, 캐서린은 침략한 스코틀랜드를 격퇴함으로서 그 신뢰에 답해 주었다. 여러 번의 사산을 겪으면서 둘 사이가 서먹해지기도 했지만, 헨리는 겉으로 아들을 낳지 못한 것에 대하여 캐서린을 비난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 블런트와 사생아를 낳은 것도 1519년, 캐서린이 마지막 아이(여섯째 혹은 일곱째)를 사산한(1518년) 이후이다.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망가진 관계이지만, 시작은 아직 세상 풍파 격지 않은 막 성년에 접어드는 순수한 18살 청년의 6살 연상의 여인에 대한 낭만적 사랑이었다 본다.
그래서 내가 본 헨리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는 아라곤의 캐서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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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of Cleves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가톨릭 교회의 압박에 저항하기 위한 정치적 동맹의 필요성을 느꼈던 헨리는, 제인 시모어가 사망한 뒤 2 년 후 1539년 3월 부터 서부 독일의 루터교 수장인 윌리엄(William, Duke of Jülich-Cleves-Berg)과 동맹을 맺기 위해 그의 여동생인 앤과 정략 결혼 협상을 시작했다. 그런데 가족 간의 종교가 달라서 그녀의 어머니는 엄격한 카톨릭 신자였고, 앤도 가톨릭 신자였지만 결혼하며 개종하였다.(혼인 무효 후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종교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인듯.)
사실 이전 부터 재혼하려 했지만 헨리가 주제 파악 못하고 미인만 고집했고, 그의 아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소문이 났기에 빨리 이루어지지 못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Christina of Denmark)도 헨리 8세의 뫙비 후보자 목록에 올랐었다. 그러나 헨리가 아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이미 유럽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지라, '내가 머리가 두 개 있다면, 하나는 영국 국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라 말하며 거절했다.
이 때는 아들도 얻은 후 인지라, 성적 매력보다는 정략적 결혼을 추진하려 했는데, 여러 초상화들 중 앤이 마음에 든 헨리는 결혼을 결정했으나, 영국에 도착한 앤을 보고 실망한 헨리는 그녀가 말같이 생겼다며 불평을 했다.
일설에 따르면 헨리8세가 클레페의 앤을 처음 부터 싫어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공식적인 만남이 있기 전, 헨리 8세는 아직도 젊었을 때처럼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몰래 변장을 하고 앤 앞에 나타나 추파를 던졌는데, 누구인지 모르는 앤이 당황하여, 뚱뚱한 중년 남자의 접근을 거절하자, 혼자 망신 당했다고 생각해서, 공식적으로 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녀에게 못생기고 냄새가 난다며 모욕했다는 말이 있다.
클레페의 앤은 제인 시모어와 마찬가지로 궁정 교육은 잘 받지 못했고(영어에도 서툴었다고), 수예에 뛰어났다. 성품도 온화하고 도덕적이며 온순하고, 아주 순진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묘사한 기록에 의하면, 키도 크고 날씬하며 금발에 사랑스런 얼굴을 하고 있다고 되어있다.
헨리는 앤과 결혼하기 싫었지만, 정치적 정략 결혼이었기 때문에 마지 못해 받아들였다. 결혼을 했어도 부부관계는 하지 않았다. 헨리는 크롬웰에게 앤을 예전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단다. 헨리는 밤에 자기 전에 손을 잡고 앤에게 키스하며 잘 자라 말하고, 아침이 되면 또 잘 잤냐고 키스하며 인사를 했을 뿐이었단다(앤에게서 성적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헨리는 앤의 시녀 였던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에게 반해, 앤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일방적으로 앤에게 이혼을 통보하며, 궁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헨리와 앤이 부부관계를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을 적법하게 무효화할 수 있었다.(같은 이유로 아라곤의 캐서린이 아더 튜더와 결혼 했었지만, 헨리 8세와 다시 적법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
자식도 없었던 앤은 혼인 무효에 동의했고, 이 결혼을 추진했던 크롬웰은 이 일이 반대파에게 빌미가 되어 표적이 되어 반역으로 처형당했다. 후에 헨리는 클롬웰의 처형을 후회했단다. (클레페의 앤이 혼인 무효에 동의해 주지 않았어도 그녀의 오빠인 윌리엄이 정치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헨리는 그녀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교황청과 대립하는 와중에 개신교 국가하고도 척을 지게 될 테니.)
앤은 영국에 영지(앤 불린 가문이 소유했던 히버 성(Hever Castle)을 포함하여)를 받고, 이전 왕비로서 재정적 지원도 충분히 받았으며, 헨리는 순순히 혼인무효에 동의 해준 앤을 자신의 '사랑하는 누이'라고 부르며 아꼈단다.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된 다음 윌리엄 율리히-클레페 공작은 헨리에게 재결합할 것을 요구했지만, 헨리에게 거절 당했단다.(헨리 8세가 어떤 인물인 줄 알면서 다시 결혼하라고 하다니, 오빠가 못됐다.)
앤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살았다. 사망 원인은 암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헨리 8세와 끝까지 사이도 좋았고, 평생 큰 걱정거리 없이 살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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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rine Howard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그림 제대로 찾은 것 맞지? 왜 이렇게 나이들어 보이냐?) |
에드먼드 하워드(Edmund Howard)와 조이스 컬페퍼(Joyce Culpeper)의 딸이며 앤 불린의 사촌이다.
아버지가 2대 노퍽 공작(Duke of Norfolk) 토마스 하워드의 아들이었지만, 맏아들이 모든 영지를 물려 받아 그다지 부유하지 자라나지 못했다. 궁에 들어가서는 첫째인 3대 노퍽 공작 토마스와 둘째인 에드워드는 왕의 신임을 얻으며 지냈지만, 에드먼드 하워드는 공작의 아들이라 자존심만 세고, 사치스럽고, 입도 험한데다가 행동도 불량해,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다.
재산 때문인지 미망인 이며, 자식도 여럿 있던 조이스 컬페퍼와 결혼 했으나, 제 버릇 못 버린다고, 도박 중독에 까지 걸려, 처자식 놔두고 잠적하곤 했다. 에드먼드 하워드는 앤 볼린이 왕비에 오르며 그 덕으로 관직에 올랐지만, 불성실한 근무 태도에 병까지 얻어 해임되었다 한다.
캐서린 하워드는 어머니는 1528년에 죽고 아버지는 두 번 재혼하며, 나 몰라라 했기 때문에, 부모의 돌봄을 거의 받지 못했고, 이모 할머니이자 의붓 할머니인 아그네스 하워드(Agnes Howard, Dowager Duchess of Norfolk)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는 공작 부인이 후견인으로 있는 귀족이지만 가난한 친척들의 자녀들이 많이 있었는데, 부인은 대부분의 생활을 궁정에서 보냈고, 피후견들의 양육이나 교육에 직접적으로 관하여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캐서린 하워드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거의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고, 순진했지만, 발랄 하고 아주 자유 분방하였다. 그곳에서 헨리 매녹스(Henry Mannox)란 음악교사를 만나 사귀었지만, 진짜 연인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매녹스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초반, 캐서린은 10대 초반 이었다 하니,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고, 나이 많은 남자의 순진한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성추행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매녹스와 헤어진 다음 캐서린은 공작 부인의 비서인 프란시스 더햄(Francis Dereham)과 사귀었는데, 진짜 연인으로 발전하여, 서로 남편과 아내로 부르기 까지 하였고, 더햄이 부재 중일 때는, 캐서린에게 재정 관리 까지 맡기는 등 거의 정말 아내로 대접했다고 한다. 그들은 결혼하기로 사전 계약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1539년 공작 부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둘의 관계는 끝나고 더햄은 아일랜드로 추방되었다.
이후 캐서린은 삼촌인 토마스 하워드가 앤 클레페의 시종으로 궁에 들여 보냈다. 꽃다운 나이 16 살의 캐서린은 궁에 들어가자 마자 곧 헨리 8세의 눈에 들게 되었고, 그곳에서 먼 친척인 토마스 컬페퍼(Thomas Culpeper)를 만났다.
클레페의 앤과 결혼했지만 헨리 8세는 앤에게는 관심이 없고 점점 캐서린 하워드에게 관심을 가졌다. 헨리는 캐서린 같은 여성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애정을 보였다. 선물 공세를 펴며 그녀를 ‘가시 없는 장미’, ‘여인 중 아주 귀한 보석’이라 칭찬했다. 삼촌인 토마스 하워드는 권력을 가질 욕심에 헨리의 아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면서도, 캐서린 하워드를 왕비로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클레페의 앤과의 결혼이 무효가 된지 19일 만에 결혼 했는데, 이 때 헨리8세는 49세, 캐서린 하워드는 17(아마도) 였다. (메리 1세가 1516년 생이다.)
캐서린은 왕과 결혼하기 전 이미 잘생긴 청년인 토마스 컬페퍼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헨리 8세가 아픈 다리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그녀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이 더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그 둘의 사이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토마스 컬페퍼가 무서운 헨리 8세의 존재에도 캐서린의 애정에 응답한 이유는 아마도, 건강이 나쁜 헨리 8세가 죽은 후 권력을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그리고 그 둘을 부추긴 것은 앤 불린이 조지 불린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헨리에게 말한 조지 불린의 아내 제인 파커였다(미친년이네.).
캐서린의 결혼 전 행실이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귀에 들어가고 왕에게도 알려진다. 헨리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결국 조사를 지시한다. 크랜머 주교는 캐서린과 더햄이 사전 계약을 하고 거의 부부같이 지낸 것이 밝혀지면, 결혼 전 관계는 간통이 아니고,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무효가 되므로, 그 둘은 추방되고 헨리 8세만 망신 당하는 선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했단다.(설마 그럴 리가. 주교는 공포에 사리 분별 못하는 10대의 어린 왕비를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조사 과정에서 더햄은 캐서린과의 과거 관계를 인정했으나, 왕과 결혼 후에는 어떤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했으나, 캐서린은 과거 관계를 끝까지 부정하였다. 그러던 중 캐서린이 컬페퍼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발견되며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달았다. 컬페퍼는 캐서린과 성관계를 가질 의향은 있었으나, 실제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고 했고, 캐서린도 불륜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연애편지의 내용이 너무나 애틋하여, 왕이 믿게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컬페퍼와 더햄은 반역죄로 각각 참수형, 교수척장분지형으로 처형당하고, 캐서린도 1542년 2월 10일 참수 당했다. 캐서린이 죽으면서 ‘여왕으로 죽지만, 컬페퍼의 아내로 죽고 싶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사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왕을 배반한 것에 대해 ‘천 번 죽어 마땅하다’며 용서를 빌었으며, 또 가족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 줄 것과,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단다. 이번엔 제인 파커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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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Boleyn English school,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토마스 불린(Thomas Boleyn, Earl of Wiltshire)과 엘리자베스 하워드(Elizabeth Howard) 의 딸로 태어났다. 토마스 불린은 앤이 헨리 8세의 총애를 입으면서 월트셔 백작(Earl of Wiltshire)의 작위를 얻었다. 출생 시기가 정확하지 않는데, 당시 자료를 종합해 보면 1507년이 더 유력한 모양이다.
앤의 아버지 토마스 불린은 외교관으로 일했는데, 네덜란드를 다스리던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의 신뢰를 얻었고, 그녀는 앤을 아주 예뻐해서 아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513년 부터 자신의 집에서 여러가지 궁중예법을 가르쳤다.
1514년 헨리 8세의 누이인 메리가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하게 되자 앤은 메리 왕비의 시녀가 되었고, 이후 루이 12세의 딸이자 메리의 의붓딸인 프랑스의 클로드의 시녀로 7년간 프랑스의 궁에 머물렀다. 여기서 프랑스어를 완벽히 익혔고, 예술 패션, 문학, 음악 종교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여러가지 지식을 익혔다. 춤도 아주 잘 추었으며, 그 당시 보기 힘든 새로운 모습의 여성이었다.
1521년 아일랜드 계 친척인 제임스 버틀러(James Butler)과 결혼하기 위해 귀국했다. 이 결혼은 남자 상속자 없이 죽은 7대 오몬드 백작(Earl of Ormond)이 딸들(딸 중 하나가 마가렛 불린으로 앤의 할머니이다)에게 작위와 영지를 남겼는데, 3대 오몬드 백작의 후손인 피어스 버틀러 경(Sir Piers Butler)이 자신이 정당한 상속자라 주장함으로서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상속 싸움 때문에 아일랜드와 전쟁까지 일어날 까봐 걱정한 헨리 8세가 중재에 나서기까지 했으나, 결혼은 깨져 버렸다. (토마스 불린이 오몬드 백작 작위를 욕심 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이후, 1522년 캐서린의 시녀로 궁에 들게 되었다. 비밀리에 헨리 퍼시(Henry Percy와 약혼 했지만, 슈루즈베리(Shrewsbury) 백작의 딸 메리 탈봇(Mary Talbot)과 아들을 결혼 시키려던 퍼시의 아버지인 헨리 퍼시(Henry Percy, 아들과 이름이 같다.) 노섬벌랜드 백작(Earl of Northumberland)이 기사의 딸인 앤의 신분이 낮다며 반대하여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는 앤에게 관심 있던 헨리가 약혼 사실을 이를 알고 결혼을 깨버렸다는 말도 있는데, 많은 영화에서 이 뒷이야기를 차용했다.)
궁정에서 앤은 우아하고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 부르며 악기도 잘 연주 했다고 한다, 지적이고 통찰력도 우수하여 대화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야심도 있는 활력이 넘치는 여성이었기에 어떤 사교 모임에서든 주목을 받았다.
1526년 부터 헨리 8세는 앤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고, 그녀를 정부로 삼으려고 했다. 그 때 이미 그는 앤의 누이인 메리 불린(Mary Boleyn)을 정부로 삼은 적이 있었다. (메리는 1520년 윌리엄 캐리(Willian Carey)와 결혼 했다. 그들의 자식 중 1524년에 태어난 캐서린 캐리(Catherine Carey)와 1526년에 태어난 헨리 캐리(Henry Carey)가 헨리 8세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헨리 8세는 인정하지 않았다. (헨리 8세의 자식은 일찍 죽거나 후손을 얻지 못했는데, 저 둘은 각각 16남매, 13남매를 낳았으니 소문이 맞지 않을 확률이 더 커 보인다. 그냥 왕과 왕비의 이름을 따라 이름 지은 듯 하다.)
밀고 당기는데 선수였던 앤은 정부가 되기를 거부했고, 몸이 달은 헨리 8세는 그 때부터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거부하자,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를 세웠다. 헨리는 교황청과 관계를 끊었어도, 속은 여전히 카톨릭 신자와 다름 없었지만, 앤 볼린은 개신교 신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후 개신교의 교세를 늘이는데 여러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휘둘렀다. 앤과 결혼 생활 중 헨리 8세는 많은 카톨릭 교도들을 처형했다.
1531년 헨리는 캐서린을 궁에서 쫓아내고 앤에게 왕비의 방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는데, 백성들은 여전히 캐서린을 지지하고 동정하였기에 앤 불린은 미움을 받았다.
앤과 헨리는 1533년 1월 25일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5일 후 캔터베리(Canterbury) 주교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 무효화를 선언함으로서, 앤과 헨리의 결혼은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왕비로서 대관식을 치루고, 9월 7일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다. 헨리 8세는 딸이어서 실망했지만, 건강한 아이를 얻었으니 아들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엘리자베스를 아꼈다. 그러나 1번의 상상 임신, 2번의 유산을 겪으며 헨리 8세의 사랑을 잃게 되었다.
앤의 활동적이며 당돌한 성격은 결혼 전에는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결혼 후에는 질투가 심하고 너그럽지 않으며,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이혼하는 부부들을 보면 흔히 결혼한 이유가 이혼하는 이유가 된단다.) 헨리와 마찬가지로 사치스러워서, 헨리의 폭정에 대한 비난이 앤에게도 쏟아졌다. 결정적으로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대중은 완전히 그녀에게 등을 돌린다.
앤과 헨리는 캐서린과 메리에게도 매우 못되게 굴었는데, 캐서린이 죽자 그 다음날 영국에서 기쁨과 축하의 상징인 노란 옷을 입고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앤은 메리와는 화해를 하려 했지만, 메리가 거부했고(당연하지, 내 엄마를 쫓아낸 아빠와 바람난 여자를 누가 받아들이나), 화가 난 헨리와 앤은 메리가 더 이상 공주가 아님을 자각하도록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삼았다고 한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어떤 미래를 맞을지 잘 알았기에, 유산을 반복하며 초조해진 앤은 더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변했는데, 그 사이 헨리는 앤의 시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에게 눈길을 주게 된다. 앤이 제인 시모어를 질투하자(캐서린은 헨리의 여자 문제에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남아있던 정마저 떨어진 헨리는 앤이 자신을 유혹하려 속임수나 마법 사용해서 결혼하게 되었다고까지 말하며 이혼을 준비한다.
앤이 몰락한 이유를 크롬웰이 그녀를 정치적인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모략을 세워 제거했다는 말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헨리 8세의 변덕으로 본다. 설에 따르면, 아들을 임신하지 못해 절박해진 앤이 오라비인 조지 불린(George Boleyn)을 침실로 불러들였는데, 차마 관계는 맺지 못했고, 조지 불린은 방을 떠났지만, 남편과 사이가 아주 나빴던 그의 아내 제인 파커가 헨리 8세에게 일렀다고 한다. 왕의 총애 말고는 믿을 것이 없었던 앤은 가족에게서도 지지 받지 못했다.
어쨌든, 헨리 8세는 앤을 조지 불린과의 근친상간, 그 외 5 명의 남자들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1536년 5월 19일 처형했다. (아라곤의 캐서린이 병으로 사망한 지 불과 다섯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왕비의 간통은 왕의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들을 왕 위에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반역이었다. 화형으로 죽이려다가 왕비였었던 것을 감안해서 참수형으로 끝냈다고 한다. 앤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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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 Seymour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존 시모어경(Sir John Seymour)과 매저리 웬트워스(Margery Wentworth)에 태어났으며, 출생시기는 정확하지 않은데, 1504년에서 1509년 사이로, 일반적으로 1508년으로 추정한다.
캐서린이나 앤처럼 수준 높은 교육은 받지 못했고, 기본 교육만 받아 글을 쓰고 읽을 줄은 알았지만,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녔다거나, 정치적 수완이 있다거나 하지 않았다. 수예나 가정을 돌보는 일에 능숙했다고 한다. 가족들도 궁정에 들여 보내기 보다는 그냥 평범한 사람과 결혼 시킬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설에 의하면, 아버지 존 시모어가 며느리와 불륜을 행하는 추문을 일으켜서 혼삿길이 막혀버렸다는 말이 있다.
그 때문 인지는 모르지만, 뒤늦게 궁정으로 들어가 1527년 경부터 캐서린 왕비(이 때는 이미 헨리가 캐서린을 거들떠 보지도 않을 때라 야심을 갖고 가족이 시녀로 들여 보냈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의 시녀가 되어 그녀를 섬기다가, 앤이 왕비가 된 다음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외모는 아주 미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며, 체구도 아담하였다.성격은 예의 바르고 온화하며, 정숙하고 유순하였다. 다툼이 있으면 중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성격상 캐서린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냥 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앤 앞에서 헨리가 선물한 목걸이를 하고, 그것을 만지작 거리며 질투심을 자극하기도 했단다. 또 헨리가 잠자리를 요구 하자 '자신의 명예는 천 명의 목숨으로도 손상시킬 수 없으며,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하며 완곡히 거절했고, 헨리는 그 정숙함에 반해 더 좋아하게 되어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되었다 한다. (어떤 이들은 제인이 캐서린 왕비를 매우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었고, 앤이 캐서린에게 못되게 구는 것을 다 봐왔기 때문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마음 속에서 앤을 왕비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앤이 한 짓을 그대로 그녀에게 되돌려 준 것 이라고도 말한다.)
앤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헨리는 앤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에게 관심을 보인다. 이를 눈치 챈 제인 시모어의 아버지와 오라비들은 그녀를 왕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애썼다는 말도 있다.
헨리와 제인 시모어는 앤이 처형 당한 당일 약혼하고, 10 일후 결혼하였다.
온화한 성품이지만, 여왕으로 서는 엄격하고 단호해서, 앤이 사치스럽게 꾸민 궁정도, 소박하게 바꾸고 호화로운 파티 등도 삼가하였다. 정치에는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다만, 보수적이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제인은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 참여자에 대한 사면을 헨리에게 부탁했었는데, 헨리에게 앤의 전례를 들며 협박당했다.).
캐서린 왕비를 존경하고 동정했으며, 메리도 안타깝게 여겨, 공주로서의 신분을 회복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적어도 헨리와 메리의 관계를 조금 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메리는 자신을 위해 노력해주는 제인에게 감사했고, 또 제인이 가톨릭 신자이기도 해서 더 호의적이었다.
제인 시모어가 "복종하고 섬기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고, 온화하고 유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헨리가 캐서린과 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가까이에서 다 보았고, 가톨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사면을 호소한다거나, 미워하고 있던 딸 메리를 변호하고 화해시키려 하는 등의 행동을 보면 나름 줏대와 용기가 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결혼 한 다음 해인 1537년 임신을 하고 10월 12일 2박 3일의 산고 끝에 에드워드 6세를 출한하였다. 15일에 행해진 에드워드 6세의 세례식에도 모습을 보여 잘 회복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출산 12일 만인 24일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헨리의 왕비 중 유일하게 왕비로서 장례식을 치른 여인이다.
앤이 처형당한 당일 제인과 약혼 했던 헨리는 제인이 죽은 후 세 달 동안 검은 옷만 입고 지냈으며, 2년도 더 지난 후 클레베의 앤(Anne of Cleves)와 혼인하였다.
헨리는 제인을 모든 아내 중 가장 사랑했다 말했고(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단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헨리에게 소중했던 것이지 가장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단다.), 죽은 뒤 제인 옆에 묻혔다.
대중 매체에서 앤 불린을 예쁜 여배우가 맡아, 매력적인 여인에 헨리 8세의 피해자로만 보여주고, 아라곤의 캐서린과 메리 1세에게 못되게 군 것은 생략해 버리니,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외국 댓글을 보면 제인 시모어가 앤 불린을 죽이고 왕비가 되었다고 악녀라하는 사람도 있던데, 왕비를 폐위하는 전례를 만들게 부추긴 것이 앤 불린이다. 왕비 자리 욕심 내지 않고, 자식을 왕 만들 욕심 내지 않고, 처음 헨리 8세가 원한대로 정부로 지냈으면 총애 받으며 잘 지내다가, 나중에 왕이 싫증 내면 다른 남자 만나 결혼해서 잘 살았을 것이다.(다른 정부들도 다 그랬으니.) 아들을 낳았으면, 헨리 피츠로이 처럼 공작 작위를 내렸다가, 적법한 후계자로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야망을 목숨과 바꾸었다. 제인 시모어는 앤과 같은 방법으로 왕비가 되었을 뿐이다.
규칙을 처음에 깨기는 어렵지만, 한 번 깨고 나면, 그 다음 다시 깨기는 쉬운 법이다. 앤이 뒷배경이 없어서 죽었지. 혼인 무효에 동의해주지 않고 7년을 버틴 캐서린을, 헨리와 앤이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캐서린 뒤에 있는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교황청과 그 영향 하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무서워서 못 죽였겠지. 또 순종적인 아라곤의 캐서린도 혼인 무효 요구에 그렇게 강하게 저항했는데, 성격 강한 앤 불린은 어떻게 할 지 누가 봐도 알 수 있느니 죽여버렸을 것이다.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촌인데, 제인 시모어도 그 둘과 증조할머니가 같다(역시 관련 없는 친척은 뺐다). 증조 할머니가 첫 남편인 틸니(Tilney)와 일찍 사별하고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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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After Hans Holbein the Young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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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rine of Aragon by Lucas Horenbou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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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와 공의회 앞에 고발된 아라곤의 캐서린 Laslett John Pott,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Link |